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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3. 2022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연주 관람기

2022년 3월 6일(일) 롯데콘서트홀

짐머만이라...

어린 나이에 쇼팽콩쿨 우승해서 날린 피아니스트.

뭐 이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연주를 잘한다더라. 뭐 이런저런 얘기 들어봤지만, 뭐 내가 그의 음악을 그렇게 챙겨 듣진 않았고 여느 전공자들이 그렇듯 나 역시 졸업 후 전공과는 멀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어설프게 대학 때에만 피아노를 전공한 나는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는 귓구멍이 막혔는지, 눈이 눈썹 위에 붙었는지, 뭐 그닥 맘에 드는 인간이 없었다. 맘에 드는 음반은 있었더라도.


그래도 이 시국에 한국에 오셔서 힘든 연주는 해내신다는 용기에, 안 가볼 수가 없었다. 이 시국에 롯데콘서트홀이 관객으로 가득 차다니.. 아직 코로나를 겪지 않아 항체 따윈 없을 게 뻔한 나는 덜덜 떨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티켓을 뒤늦게 예매했고, 맨 뒷자리를 겟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곡의 프로그램은 총 3개의 세션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바흐의 파르티타 1번, 2번, 두 번째는 잘못 들으면 욕처럼 들리는 시마노프스키의 작품들, 세 번째는 쇼팽의 소나타 3번이다. 우선 바흐의 파르티타!


개인적으로 나는 바흐 연주를 피아노로 하는 경우 굉장히 긴장한다. 바흐를 쇼팽처럼 칠까 봐 떨려서이다. 예전에 나름 잘 친다는 피아니스트의 독주회를 갔다가 바흐 작품을 마치 라흐마니노프처럼 연주하는 것을 들은 후 속이 울렁거리고 화가 빗발쳐서 결국 뛰쳐나온 경험이 있다. 피아노도 못 치는 주제에 이상한 똥고집 같은 게 가득한 나다. 기름기 가득한 느끼한 바흐는 도대체가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떨었다. 쇼팽콩쿨 우승자인데,... 바흐를 또 쇼팽으로 만들면 어쩌지. 이 티켓값을 무르고 또 뛰쳐나가야 하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바흐는 너무나도 담백했다. 담백하고 소탈했다.

이 공연을 홍보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까다롭고 예민한 연주자'라는 말이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기획사에서는 짐머만은 마이크와 작은 소리에 매우 예민해서 촬영도 안되고 녹음도 안된다고 강조, 또 강조를 했다. 하지만 그의 바흐는 그렇게 까다롭고 예민하지 않았다. 그저 소박했다. 깔끔했고 부드러웠다. 사라방드는 아름다웠고 쿠랑트는 종소리 같았으며, 지그와 신포니아는 오르간 소리 같았다. 소리 하나하나를 까다롭게 다듬었을 텐데,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이렇게 편안한 파르티타라니. 너무 바흐스러웠다. '소박'이라는 단어에 '바흐'라는 작곡가를 붙이자니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기분이 그랬다.


두 번째, 시마노프스키의 작품들... 우크라이나 태생의 시마노프스키는 후기 낭만, 20세기 초의 음악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나는 사실 그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제대로 들어봤다.

짐머만은 참으로 '영리'했다. 두 번째 세션을 들은 후 내가 딱 느낀 기분이다. 편안한 바흐를 듣고 노곤 노곤해진 내 마음에 시마노프스키의 작품들은 마음을 휘젓기도 두근거리게도 하면서 흔들어 놓았다. 작품의 문제가 아니었다. (뭐 작곡가가 곡이야 잘 썼겠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이 구성이 그랬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무조성의 음악에, "나 이런 곡도 할 줄 알아"라고 보여주듯이 짐머만은 완벽히 마무리했다. 마치 프렐류드와 마주르카의 8곡이 하나의 모음곡으로 묶인 듯 하나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무작위로 쓱쓱 뽑아낸 줄 알았더니, 이미 있는 작품들에 '구성'이라는 예술성을 가미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쇼팽의 소나타 3번. 짐머만이 '쇼팽'했다. 뭐, 그럼 말 다 한 거 아닌가. 쇼팽콩쿨 우승자의 공연을 다녀오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바로 그들은 적어도 '쇼팽' 작품만큼은 정말 기똥(!)차게 연주한다는 것이다. 정말.. '미친놈 아니야?'라는 생각을 절로 한다. 조성진의 공연 때도 그랬고, 작년 갈라 콘서트 때도 느꼈다. 정말 기똥(!)차게 잘 친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친구들은 모두 알 것이다. 쇼팽의 에튀드가 어떤 의미인지... 쇼팽의 에튀드는 예술중학교를 들어가거나, 예술고등학교를 들어가거나, 음악대학을 가거나 항상 기본이 되는 오디션 작품이다. 총 27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작품번호 10과 25에 해당되는 24개의 연습곡은 그냥 모든 오디션의 기본이 된다. 대학 입시를 치른다면 그냥 주야장천 2분 남짓되는 에튀드 한 곡을 고3 내내 주야장천 친다. 치고 또 치고, 눈 뜨고 치고 눈 감고 치고, 나는 눈 가리고도 쳤다. 미친놈처럼 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손에서 떠나는 순간이 온다. 내가 마음먹지 않아도,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냥 후루룩 쳐지는 순간이 말이다. 20년 정도 피아노를 친 나에게도 그런 순간은 대학 입시 때 딱 한번 왔다. 정말 '미친놈'처럼 그냥 딱 쳐지는 마법 같은 순간 말이다.

쇼팽 콩쿨 우승자, 혹은 적어도 콩쿨을 준비했던 연주자들은 아마도 그렇게 연주를 해낼 거다. 쇼팽 작품이 그냥 내 손을 떠나가서, 그저 후루룩 나오는 그 순간처럼 말이다. 적어도 짐머만이 오늘 연주한 쇼팽이 그러했다. 그냥 내 손과 내 정신이 이미 떠나가 있는 느낌 말이다. 한 30년 운전해서 이젠 슬쩍만 봐도 길이 보이고, 집에 돌아가는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물론 운전 중 완벽한 드라이빙과 코너링을 보여주진 않았을 지라도, 그 누구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아, 얘는 지금 집에 돌아가는 길이구나. 평생을 다니던 길을 그냥 걷는 중이구나... 이렇게 말이다. 그의 나이에 딱 맞는 쇼팽이었다. 세밀하고 정확하지만 조금은 날이 서있는 젊은 이의 쇼팽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이제는 하얗게 물들어져,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쇼팽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너무 날카롭지 않아서. 너무 편안해서.


평생의 연주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가성비 꽝인 직업이다. 사람들은 음악하는 이들이 '천재'인 줄 아는데, 사실 '천재'는 잠깐이다. 평생의 연습과 연습, 연습이 없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이거다. (그래서 나는 진작 관뒀다.) 가성비 꽝이 직업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하나둘씩 일어나서 박수로 화답하고, 하얀 머리의 연주자는 묵묵하게 인사를 마치고 무대를 벗어났다. 역시 클래식 음악은 공연장에서 들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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