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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3. 2022

음악,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한 날

나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대학에 딱 들어갔는데, 사실 나는 그전까지는 아무것도 몰랐어서, 피아노를 얼마큼 쳐야 잘 치는 건지도 잘 몰랐다. 그냥 남들이 조금 잘한다고 해주니 그런 줄 알았지.

대학에 딱 들어가니 참 잘 치는 애들이 많더라. 나는 열심히 연습해도 항상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는데, 다들 참 잘도 쳤다. 학교 들어가자마자, 나도 반주도 하고, 피아노 레슨 하면서 용돈도 벌고, 정말 멋지게 대학생활을 해내고 싶었다. 그냥 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던 거 같다. 내 재주는 정말 하찮기 그지없었던 거였음을...


나는 한 곡을 시작하게 되면 한 시간 이상을 악보를 뜯어보며 악보 읽는 데 시간을 소요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내 친구들은 그냥 악보를 보고는 슈르륵~ 쳐냈다. 그게 "초견"이랬다. 초견? 나는 그런건 할 줄 몰랐다. 수학기호같이 생긴 악보를 분석하고 따져보고 그것을 연주해내는 것에 급급했던 나는 항상 남들보다 저 뒤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여러 전공수업들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화성법과 약간의 작품분석을 해보기는 했지만 그걸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자 나는 너무 어려웠다. 피아노도 따라가기 힘들었고, 다른 수업들도 그러했다.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하기 힘들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는 참, 열심히 했다. 친구와 연습실을 들락거리며 매 학기 주어진 과제들을 최선을 다해했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대학도 졸업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일이다. 한참 "졸업하면 뭐하나"의 고민을 힘들게 할 시기였다. 나는 여전히 여러 수업들을 듣기 급급했지만, 졸업 후 앞으로의 일이 걱정돼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그때 클래식 전문 음악기획사라는 것이 생겼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그 회사에서 일을 했고, 그 사람이 나에게 너도 그런 일을 한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하지만 학교 수업이랑 병행하기는 힘들 거야. 우선 휴학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일에 뛰어들어보렴!"라고 말했다.


뭐, 휴학을 하라고? 이미 대학 1학년 때 아파서 1년을 쉬었던 나로서는 더 이상의 휴학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학교를 졸업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일을 시작해본다니. 그 회사에서 나를 뽑아 주고 말고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다시 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가 피아노를 평생 치지 못할 것은 알았다. 내가 백건우나 정명훈, 백혜선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할 것은 알았다. 그렇다고 지금 졸업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일을 시작하기는 싫었다. 조금 늦더라도 그냥 우선은 끝마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미안해. 나 아무래도 우선 대학 졸업장은 따야 할거 같아.. 나 대학 다니는 순간만이라도, 그냥 열심히 피아노를 쳐볼래."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대학 4학년을 보냈다.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마지막 1년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피아노 치는 것은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기에, 내가 이 일을 내 직업으로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남은 1년 만은 정말 열심히 해내고 싶었다. 졸업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이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진짜 일을 찾아보겠다고. 나중에 환갑쯤 되어 내 일이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들어지면, 은퇴를 하게 되어 별다른 일을 안 해도 될 시기가 온다면 그때 다시 피아노를 치겠노라고. 이 무슨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나는 내 재능이 여기까지임을 알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60대 이후로 넘겼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았던 대학 시절, 나는 피아노를 포기했다. 더 이상 연주자로서의 삶은 취미로라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졸업 후 몇 년 동안 아쉬움에 몇 번의 연주를 하긴 했었지만, 내 일을 시작하면서는 피아노 앞에 제대로 앉은 적도 없다. 악보를 본지 꽤 오래 지난 요즘은 악보도 낯설다. 아니 오른손이랑 왼손을 악보를 보면서 어떻게 같이 치지? 피아니스트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집에 피아노는 고이 간직해뒀다. 환갑이 넘으면 은퇴하고 다시 칠 거다. 그때 되면 반주 봉사도 하고 싶고, 예전에 꿈만 꿔봤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도 치고 싶다. 물론 벌써 겨울 되면 손가락 사이가 시큰하고 바람도 슝슝 들어오는 거 같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렇게 멀게만 보이던 '환갑'이 생각보다 별로 오래 남지 않았음에 놀라워하며, 지금은 내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백발 할머니가 뒤늦게 피아노 시작해서 오케스트라랑 협연도 하고 음악을 즐기며 노후를 잘 보내고 있다고 소문나지 않겠는가. 갑자기 얼마 남지 않은 내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60부터는 새롭게 바빠질 인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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