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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Apr 24. 2019

여행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

기억의 유통기한

걷다.

인도 바라나시를 걷다.


 한국에 돌아와 인도 여행 동행이었던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본격적인 홈파티를 하기 전까지 우린 방안에 젖은 빨래처럼 각자의 모양대로 축 널브러져 있었다. 옅은 졸음이 몰려오려고 해서 눈을 감고 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빨래 1 인선이가 물었다.

 “재밌는 이야기 좀 해봐. 여행에서 뭐 없었어?”

우리가 헤어지고 어떤 여행을 했는지, 특히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모르는 척하며 재밌는 이야기가 뭐냐고 되물었다. 잠시 후 인선이는 다시 물었다.

 “언니. 바라나시에서 좋은 사람 만났어?”

 내가 좋아하고 친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고, 좋은 사람을 만났느냐고. 그 말은 잘 지냈냐고 묻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내게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건 좋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바라나시에서 완전 아싸였어. 혼자 게스트하우스 그 추운 골방에서 팔찌 만들면서 새해맞이 했다니까? 내 생애 가장 고독한 새해를 보냈지.”

“거짓말. 언니가 아싸 라니 말도 안 돼.”

“진짜야. 몇 명 만나서 밥 먹고 가트 가서 같이 앉아있기도 했는데, 열흘 중에 이틀 빼고 나 혼자 있었어. 한국 사람들 많았는데 바라나시에서는 혼자 있고 싶더라. 너희랑 헤어지고 바로 새로운 사람 만나면, 괜히 애인 두고 바람피우는 것 같아서. 너희는 안 그랬지?”     

2019년 1월 1일은 인도 바라나시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냈다. 바깥은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음성과 폭죽 소리로 가득했다

 인도의 유명한 관광지에서도 물론 한국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유난히 바라나시에는 한국인이 많았다.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그곳에서는 한국인들끼리 마주치면 인사하는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눈 찡긋, 입 방긋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는 유형. 두 번째는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당신도 한국분이시군요' 눈빛을 보내는 유형. 세 번째는 눈은 마주쳤지만 내 갈길 간다 유형. 나는 세 번째 유형에 가까웠다. 번잡한 좁은 골목길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는 한국인과 마주치면 못 본 척하거나 때론 가벼운 목례만 하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다 사람들과 고루 섞일 수 있을 때가 찾아와도 그 자리에서 금방 일어나곤 했다. 오랜 시간 좋은 사람들을 만난 후엔 낯선 이들과 멀리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 사람처럼 까다롭게 굴었다. 내겐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함께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혼자가 되는 것이 반복된다. 누군가 함께 있다가 다시 혼자가 될 때, 이상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혼자가 됐을 때 적어도 그 도시에서는 동행을 만들지 않는 것. 웬만하면 새로운 사람과 말을 섞지 않고 고립을 선택한다. 마치 연인이 헤어지고 나서 바로 연애 상대를 찾지 않는 게 암묵적인 예의인 것처럼 내 여행에도 그런 비슷한 룰이 적용됐다. 함께 했던 추억을 반추하며 그리워하는 미련 철철 넘치는 전여친이 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함께 할 때 보다 혼자가 됐을 때 함께했던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한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과 함께했던 장면들이 옅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빈자리에 덥석 채우기엔 그들의 빈자리가 턱 없이 크게 느껴진다. 되도록 비워두고 그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빈자리엔 누가 있었고, 어떤 교감을 했는지, 그들이 새기고 간 궤적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인도 바라나시

 사람을 곁에 둔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사람-사람으로 가득한 여행은 과부하가 오곤 했다. 그래서 소원해진 관계들을 흘려보내는 시간을 갖기도 했고, 일정 한 거리를 두며 관계에 대한 정의를 유보하기도 했다. 스무 살 초 중반 때만 해도 사람을 가득 담아 두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절반 정도는 빈 상태. 언제든 좋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면 무리 없이 담을 수 있는 상태가 좋다.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카톡을 삭제하고, 사람들과 약속을 잡지 않았던 건 빈칸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일정 시간 빈틈을 주지 않으면 그 전의 기억들이 희석되어 맹숭맹숭한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책을 연달아 읽거나 시리즈물을 몰아보면 남은 거 없이 허무함이 밀려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가공시켜 놓는 단계를 거쳐야 기억의 유통기한이 길어짐을 느꼈다. 빈칸 안에는 만났던 사람들의 진한 기억으로 채운 다음에야 사람을 만날 에너지가 생겼다.


 누군가 같이 있을 때만큼이나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고 싶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함께 했던 기억이 보다 선명하고 짙은 색으로 채색된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듣다.

Homeshake의 Just like my를 듣다.


*자주 읽고, 가끔 씁니다.

@hoyou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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