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으로 살아가며, 수많은 이들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다 죽어간다.
본질적으로 생각해보자. 태초로 돌아가,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이는 없다.
흔히 '하고 싶은 것'은 생존이라는 과제 앞에서 뒤로 미루어야 할 철없는 욕망으로 취급받는다. 반면 '해야 하는 것'은 삶을 지탱하는 숭고한 기둥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두 언어에 위계와 무게를 부여한 것은 절대적인 섭리가 아니다. 불확실한 내일을 두려워한, 불완전한 인간 스스로가 만든 규칙일 뿐이다.
애초에 두 단어는 그 어떤 강제성도 없이 평등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2.
삶은 인간에게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선택의 주체는 인간이다. 삶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을 거부할 권리는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인간은 저마다의 두려움과 이유로 이 강요에 순응하며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가 그 강요 뒤에 숨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한 대가로 우리는 사회적 소속감과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장받는다. 하지만 그 안락함의 대가는 혹독하다. 그들은 미래의 결과를 얻기 위해,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인 '현재'를 지불한다.
3.
그렇다면 끝까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 인간은 어떠한가?
대부분 비참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하게 살아갈지언정, 편안히 죽어가지는 않는다.
이들이 겪는 비참함의 실체는 단순히 가난이나 사회적 배제 같은 외부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진짜 비참함은 그들의 내면에 있다.
자신을 증명해 줄 보증이 없는 그들은, 매 순간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자기 검열과 싸워야 한다. 남들이 안락한 길을 걸을 때, 홀로 불확실한 벼랑 끝에 서서 자신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자유의 비용이다.
4.
그렇다면 이토록 가혹한 의심과 고통 속에서도, 그들을 계속 걷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 먼 훗날의 찬란한 성공을 확신해서인가? 아니다. 지금 당장이 마냥 즐거워서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행위는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생존 본능이다. '해야 하는 것'에 맞춰진 안락함에 길들여져 사느니, 차라리 고통스럽더라도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남기를 택한 것이다.
5.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차이가 없다. 차이는 오직 감당해야 할 고통의 종류에 있을 뿐이다.
안락함 속에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후회의 고통'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불안의 고통'을 택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비참함을 짊어지고,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