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의 로맨스
글을 쓰기 전에 하이틴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봤다. 하이틴은 국어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괄호 안에 High teen이라고 부가 설명이 달려있고, 의미는 '10대 후반의 나이, 또는 그 나이의 남녀, 주로 17~19세'라고 적혀있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생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하이틴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잘 없으며 최고를 의미하는 '짱'이라는 말처럼 한물간 용어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종종 '하이틴물', '하이틴 영화'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하나의 장르로는 여전히 통용되고 있나 보다.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로맨스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한 영화만 콕 집어 말하기는 좀 뭣해서 2개 영화를 묶어봤다.
30살을 코 앞에 뒀지만 종종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즐겨본다. 이야기의 패턴이 비슷해서 단순하고, 대체적으로 해피엔딩이기 때문에 가볍게 볼 수 있어서다. 보통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이 외모가 뛰어나거나 인기가 많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친구의 그룹에 속해있거나 아니면 영화가 전개되면서 그 그룹에 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사랑하게 되거나 깨닫게 되고 진정한 친구를 만난다. 영화는 이러한 교훈적인 내용을 끝으로 훈훈한 결말을 맺는다.
미국의 하이틴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와 다른 방식과 문화를 느꼈다. 첫 번째, 복도에 긴 락커가 있는 것. 아마 이동식 수업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사물함이 전부 교실 안에 있었다. 게다가 혹시 분실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사물함에 뭔가를 두고 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사물함을 예쁘게 꾸며놓기까지 하는 걸 보고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두 번째는 프롬(Prom). 이건 사실 로망이다. 나의 하이틴 시절에는 노래방이 가장 큰 가무 장소였는데 공식적인 무도회가 있다니. 상상으로는 예쁜 드레스를 골라서 화장도 해보고, 파트너가 집까지 데리러 오고, 손목에 꽃을 찬 채로 사진을 찍는 것이 모두 아름답게 느껴졌다. 프롬에 가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성공적 일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은 퀸비(Queen bee), 바로 여왕벌이다. 모든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의 주축이 되는 여학생. 영화 속에선 불변의 진리처럼 이런 학생은 꼭 재수가 없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여왕벌이 없었다. 예뻐서 유명한 애들은 있었지만 여왕벌 행세를 하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저런 애들이 나중에 어떻게 변할까를 궁금해한 적이 있다. 계속 이기적으로 살까? 아니면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인 걸 깨닫게 될까?
청소년기의 대표적인 고민 중 두 가지가 외모와 이성친구라고 한다. (이 통계는 내가 고등학생 때 봤던 거라서 지금은 좀 다를 수도 있다) 나도 이 두 가지 때문에 울고불고 자괴감을 느꼈던 날들이 많았다. 외모에 대한 불만족은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지고 곧잘 이성친구와의 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거울을 볼 때면 내 얼굴에서 또는 몸매에서 안 예쁜 부분만 눈에 들어오는데 아마 이성친구도 그렇게만 보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내가 보는 방식으로 세세하게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꽤 지나서야 깨달았다.
청소년기에는 아직 잘 모르지만 이제 좀 알 것 같은 시기라서 겪는 고민들이 있다. 친구들끼리 고민을 얘기해봐도 더 나은 사람은 없지만 어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선생님이나 부모님, 요즘에는 학교에 상담 선생님까지 별도로 있는데도 '어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선뜻 마음을 털어놓기가 어렵다. 어른들의 대답은 이미 다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청소년이 보기에는 이미 해탈 단계에 이른 사람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소년의 마음에 와 닿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내 곁에 어른의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데 또래인 친구가 있다면?
영화 '17 어게인'에서 마이크가 바로 그런 친구이다. 하이틴, 즉 청소년의 입장에서 보면 마이크는 부모님들이 원하는 친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이크의 입장에서 영화를 본다면, 마이크는 두 번째 10대를 맞이한 거다. 처음에 마이크는 두 번째 10대를 자신의 커리어를 위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친다. 내가 이미 만들어놓은 미래를 바로잡기 위한 시간이지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거다. 마이크가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 부인(이혼 조정 기간이니까 '전 부인'은 아니지 않을까)과의 얘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현실을 살다 보니 서로에게 소원해졌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나에게만 집중해서 상대방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닐까? 내가 힘든 것, 내가 희생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다 보니 상대방이 희생한 것과 하고 싶은 것에는 관심 둘 여유가 없었던 거다. 상대방을 들여다봄으로써 마이크와 스칼렛의 관계는 좋아진다.
하이틴 시기를 다 겪고 보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어른 되면 달라질 거야, 어른 되면 이렇게 안 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학교 들어가면, 고등학생 되면, 이번 시험만 끝나면, 오늘만 지나면, 이러한 조건을 달았을 때 지키지 못했다면 어른이 된다고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원래 그래, 지나고 나면 별 것도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있다면 되돌아보기를 바란다. 정말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그게 지금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