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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May 01. 2022

좋은 어른이 되는 것만으로

220427 국방일보 조명탄 기고

얼마 전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대안 학교에 다니는 열여덟 살 학생이 학교 수업 중 각자 멘토를 찾고 직접 만나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제를 하고 있다며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평소 여러 음악을 듣고 이를 글로 옮기는 일이 멋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잠시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망설여졌다. 나는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조언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해줄 만한 이야기도 마땅치 않다.


꼬박 하루를 고민했다. 거듭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지만, 단지 일면식도 없는 학생의 용기가 마음에 걸렸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하루 속을 끓이던 대학 신입생 시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동경하던 모 작가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하고 바쁘게 활동하던 작가였기에 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며칠 뒤 답장이 왔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답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어린 내겐 큰 응원이 됐다.


결국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내가 ‘혹여 거절하더라도 꼭 답장을 부탁한다’는 또 다른 어린 학생의 기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법이다. 요청에 응하고 며칠이 지나 질문지를 받았다. 예상보다 심오한 질문이 많았다. ‘살면서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 언제냐’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10대의 시선에선 어른이라면 한 번쯤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을 것 같겠지만, 성인(聖人) 아닌 보통의 성인(成人)은 그런 일이 드물지 않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나를 만나러 온 학생은 세 명이었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흔히 그리는 ‘힙’하고 ‘쿨’한 Z세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긴장한 듯 멋쩍게 웃으며 자신들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예전 내가 고등학교에서 자주 보던 친구들 같았다. 생각해보니 Z세대라고 해서 뭐가 그렇게 다르겠는가. 그들 또한 꿈 많고 호기심 많은 학생이었다. ‘요즘 학생’에 무심코 품은 선입견을 자책했다.


역시나 답변은 술술 나오지 않았다. ‘진로를 결정할 때 꿈과 돈 중 무엇을 좇아야 하느냐’ 같은 물음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느 쪽도 확실히 정답이라고 할 수 없거니와, 각자 처한 현실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대학이 인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들이 집에 돌아가 대뜸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떡하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경청하는 이들을 보며 행여 의도치 않게 악영향을 주진 않을까 내내 염려했다.


학생들의 마지막 질문은 이러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저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조언은 어려워도 당부는 쉬웠다. 사람은 다만 착하게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이웃은 힘닿는 만큼 돕고, 같이 손을 잡고 살아가야 한다. 약자를 차별하고 괴롭히면 안 되고, 어떤 상황에도 정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늘 그렇게 배웠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사는 어른이 되기도 하니 세 사람만은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큰 보탬이 될 테니까.


짧은 만남을 끝내고 아이들을 배웅하면서 한참을 생각했다. 정작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자라나는 새싹에 감히 이러쿵저러쿵 떠들 만큼 너는 좋은 어른이 되었느냐.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날 학생들에게 한 말은 모두 나를 향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들이 좋은 어른이 돼 10대를 돌아볼 때, 어느 봄날 여의도 한 카페에서 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도 스쳐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작가는 이외수 씨다. 이 글을 넘긴 날 저녁, 그의 부고를 접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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