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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May 27. 2022

글 쓰는 고통, 글 쓰는 기쁨

220526 국방일보 조명탄 기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주로 대중음악에 관해 쓰지만, 때에 따라선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에 관해 쓰기도 한다. 물론 글만 쓰는 건 아니다. 방송, 강연과 같은 말하기 또한 주요 활동 영역이다. 사실 효율 측면에선 이쪽이 낫다. 둘을 비교하자면 내겐 쓰는 것보다 말하기가 월등히 수월하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말하기를 모두 좋아했지만, 언제나 글보단 말이 편하고 즐거웠다. 글에 자신이 있었던 적은 드문 반면, 말에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래도 평론가의 기본은 늘 글쓰기라고 믿고 있다.


처음부터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걸 경계했다. 학교에서 논술 수업을 듣던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께선 어느 날 내 글을 보시더니 “너는 나중에 글로 먹고살아도 되겠다”고 하셨다. 고등학생에겐 과찬이었다. 그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 눈을 바로 보시던 선생님의 커다란 눈, 따뜻한 목소리. 삐딱한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커서 절대로 글로 먹고살진 않아야지.’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정말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됐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어렵다. 쓰는 게 일이 되면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는데. 이 글도 하루를 다 보내고 깜깜한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쓰고 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일정이 있는 관계로 빨리 쓰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지만, 역시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일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일을 나가며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자신을 책망할 것이다. 내일 써야 하는 다른 글을 아직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내 처지를 비관하면서.


간혹 뛰어난 작가를 볼 때면 내심 자괴감을 느낀다. 일 년에 몇 권씩 책을 내는 사람, 빠른 속도로 글을 끝내는 사람,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일정한 완성도로 써내는 사람. 특유의 글맛으로 읽는 이를 빠져들게 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내 주변에도 나를 위축시키는 작가가 많다. 이들은 심지어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푸념조차 흡인력 있게 쓴다. 그런 이들과 나를 비교하면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게 민망할 지경이다. 세상에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 사이에서 내가 쓰는 사람일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글쓰기는 내게만 어려운 게 아니란 것이다. 나 말고도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많은 이들이 수시로 글쓰기의 고통을 호소한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새벽에 소셜 미디어에 들어가 보면 원고 마감으로 긴 밤을 보내고 있는 많은 동료가 보인다. 그들 또한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해 인터넷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별 의미 없는 안도감이 나를 휘감는다. 오늘 밤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나를 가르친 선생님께선 ‘글 감옥’이란 표현을 즐겨 썼다. 그만큼 글쓰기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란 뜻이었을 테다.


그런데도 나는 결국 글쓰기를 택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어디선가 누군가는 읽어줬으면 했다. 쓰다 보니 하나둘 글이 쌓였고,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 아주 힘들게 썼다. 쓰는 내내 내가 글 쓰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들어선 쓰는 고통만큼이나 쓰는 재미가 커지고 있다. 이제야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조금씩 든다. 감히 앞으로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고등학생 내게 글로 먹고살라던 선생님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가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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