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로 만나는 한스 짐머의 창대한 음악 세계
“영화음악에 관한 한 지금은 한스 짐머(Hans Zimmer)의 시대다.” [아나스타샤](1997)를 포함해 100여 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만든 작곡가 데이비드 뉴먼(David Newman)의 말이다. 비록 한스 짐머 자신은 그의 단언에 손사래를 쳤지만, 영화와 음악, 혹은 영화음악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부정하긴 어렵다. 우리는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 제리 골드스미스(Jerry Goldsmith),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시대를 거쳐 한스 짐머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의 시작은 키보디스트이자 프로듀서였다. 당시 모습은 영국 밴드 버글스(The Buggles)의 메가 히트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1979) 뮤직비디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상 후반에 등장하는 신시사이저 연주자가 바로 그다. 한때는 그가 이 곡을 프로듀싱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지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을 뿐이다. 이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Jerzy Skolimowski) 감독의 영화 [성공은 최고의 복수](1984) 음악 작업에 참여하면서 영화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했고, [레인 맨](1988), [그린 카드](1991) 등의 음악으로 주목받던 중 [라이온 킹](1994)으로 생애 첫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정상 궤도에 올랐다.
지금과 같은 위상이 형성된 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글래디에이터](2000), 마이클 베이(Michael Bay)의 [진주만](2001), 에드워드 즈윅(Edward Zwick)의 [라스트 사무라이](2003) 등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 음악을 작업하면서 그만의 개성이 선명해졌다. 결정적인 파트너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었다. 두 사람은 [배트맨 비긴즈](2005)를 시작으로 [다크 나이트](2008), [인셉션](2010),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등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고유의 어둡고 강렬한 음악 세계를 확립했다. 이후에 나온 [인터스텔라](2014)와 [덩케르크](2017), 그에게 27년 만에 오스카를 안긴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의 [듄](2022)은 영화의 품격을 높인 영화음악 걸작으로 꼽힌다.
한스 짐머의 영화음악은 대개 이야기 전달에 중점을 둔다. 음악을 통해 관객이 정서적인 체험을 하고 극에 몰입하도록 돕는다는 의미다. 그는 감독이 영상이나 대사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스토리텔링을 음악으로 해낸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음악이 영화의 부속품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영화음악은 영화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영화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초에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음악이 이제는 영화의 테두리를 벗어나 공연장으로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현상에도 고무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일찍이 영화음악 실황 공연의 잠재력을 몸소 확인했던 음악가다. 그가 2014년에 런던에서 처음으로 열었던 두 번의 단독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빚었다. 극심한 무대 공포를 극복하고 공연장을 휘어잡은 그의 카리스마에 관객은 뜨거운 환호를 보냈고, 이는 2016년 첫 번째 유럽 투어의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한스 짐머의 라이브는 하나의 공연 브랜드로 거듭났다. 유럽을 넘어 북미와 아시아에서도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2017년과 2019년에 그의 공연이 열렸다. 당시 우리 관객들은 거장의 지난 궤적을 직접 느꼈다며 찬사를 보냈다.
본작은 그가 콘서트 투어를 시작한 2016년 이후 세 번째로 내는 실황 앨범이다. 한스 짐머가 2022년에 진행한 투어를 기반으로 하는 [LIVE]는 러닝타임부터 남다르다. 그의 최근작 중 만장일치의 호평을 받았던 [듄]부터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 [인셉션], [원더 우먼 1984](2020), [다크 나이트], [라스트 사무라이], [캐리비안의 해적], [라이온 킹] 등 열네 편의 영화음악을 모았고, 새롭게 편곡하고 메들리로 이어 붙인 서른한 트랙을 장장 2시간 13분에 걸쳐서 담아냈다. 앨범을 듣는 것만으로 영화 몇 편을 본 듯한 압도적 경험을 선사한다. CD 2장에 담긴 마에스트로의 음악 세계를 들여다본다.
[LIVE]
대다수 영화음악 콘서트의 구성은 이렇다. 무대 위 연주자들이 영화를 대표하는 스코어, 혹은 주제곡을 오리지널 그대로 연주하면, 무대에 설치된 거대 스크린에선 해당 작품의 주요 장면을 엮어 상영한다. 다시 말하면, 생음악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한스 짐머의 콘서트는 다르다. 일단 그의 공연장에선 영화 속 명장면을 다시 볼 수 없다. 그와 연주자들이 [다크 나이트]의 섬뜩한 스코어를 연주하는 동안 히스 레저(Heath Ledger)가 연기한 조커의 얼굴은 잠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신 음악에 걸맞은 조명 연출과 그래픽 영상이 무대를 가득 채우며 관객의 몰입감을 높인다. 보통의 필름 콘서트와는 여기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그의 공연에선 레퍼토리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실황 앨범의 트랙 리스트를 보자.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개별 노래의 제목이 아닌 영화 제목에 ‘Suite’를 붙이고 작품 번호를 매겨 트랙을 나누고 있다. 우리말로 ‘모음곡’이란 뜻의 이 단어가 붙은 건, 그가 한 작품의 스코어 중 여러 곡을 모음곡으로 재구성해 배치했기 때문이다. 한스 짐머는 작품마다 인상적인 멜로디를 각인하고 이를 변주하는 대신, 작품과 장면에 어울리는 음향, 사운드를 치밀하게 디자인하며 음악으로 영화의 외연을 확장해온 음악가다. 모음곡 형식은 그런 그의 음악 파노라마를 무대에서 온전히 구현하기에 알맞은 작법이다. 여기에 [듄], [인셉션], [덩케르크]의 트랙을 톤과 완급을 고려해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완벽한 구성미를 갖췄다.
[LIVE]는 든든한 조력자들 덕분에 완성됐다. 그가 ‘혁신적 공동체’(The Disruptive Collective)라고 부르는 연주자 집단이다. 베네수엘라 출신 플루티스트 페드로 에스타케(Pedro Eustache), 영국의 업라이트 베이스주자 앤디 패스크(Andy Pask), 중국 출신 첼리스트 티나 구오(Tina Guo), 미국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리아 제거(Leah Zeger) 등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정상급 연주자들이 한스 짐머의 혁신을 위해 뭉쳤다. 공연에 참여한 주요 연주자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는 앨범의 부클릿과 한스 짐머 라이브의 웹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명 한 명 뚜렷한 개성과 실력을 갖춘 쟁쟁한 음악가다.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유서 깊은 오케스트라인 ‘오데사 오페라 오케스트라’(Odessa Opera Orchestra)의 풍부한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본 앨범을 들을 때 권하고 싶은 감상법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가급적 실제 공연장에 간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내서 첫 곡부터 순서대로 들어보자. 모든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공연자의 의도가 담긴다. 서막을 장식하는 [듄]의 사운드트랙 ‘House Atreides’에서 생경하고도 신비로운 여성 가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한스 짐머의 장엄한 소리 풍경이 펼쳐진다. 이때부터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고전 악기와 현대 악기가 겨루듯 팽팽하게 맞서면서 하모니를 이루고, 부피가 크고 거친 사운드가 역동적으로 꿈틀대며 듣는 이를 빨아들인다. 특유의 다이내믹을 통한 긴박감, 생동감 연출도 상당하다. [글래디에이터], [라스트 사무라이] 등에선 비장미, 서정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한스 짐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셉션]의 ‘Time’까지 흐르면 어느새 2시간 13분이 쏜살같이 지나가 있다.
만약 수록곡을 골라서 듣는다면, 반드시 모음곡 단위로 들어야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메인 테마곡인 ‘He’s a Pirate’이 듣고 싶다고 ‘Pirates of the Caribbean Suite: Part 3’만 듣는 건 한스 짐머가 설계한 음악적 재미를 극히 일부만 맛보는 것과 다름없다. [라이온 킹]도 마찬가지다. ‘Circle of Life’의 상징적인 도입부터 감동적인 ‘He Lives in You’, 스펙터클한 ‘To Die For’를 지나 밝고 희망찬 ‘King of Pride Rock’으로 마무리되는 흐름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The Lion King Suite’의 세 파트를 차례로 들어보시라. 모음곡이 끝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박수가 터질지 모른다.
마지막 한 가지. 가능한 좋은 음향 환경에서 볼륨을 최대한 높여서 들어볼 것을 권한다. 그 순간 당신은 [다크 나이트]의 고담 시티에서 전력으로 질주할 수도, [덩케르크]의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인터스텔라]의 거대하고 막막한 우주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청각이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가능케 하는 감각인지 실감할 수 있을 테다. 동시에 한스 짐머의 콘서트 현장에 앉아 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소리의 밸런스를 탁월하게 담아낸 덕분이다.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 3부작, [덩케르크] 등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소리, ‘셰퍼드 톤’의 질감에도 집중해보자. 섬세한 소리 장인의 디테일이 귀에 들어올 것이다.
왜 지금이 한스 짐머의 시대인지 역설하는 앨범이다. [LIVE]는 이미 영화음악에서 일가를 이룬 거장이 라이브 투어라는 새로운 영토를 완벽히 개척했음을 증명한다. 그가 아니라면 이런 창의적인 공연, 이런 실황 앨범은 나오기 어렵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원동력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그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연말 개봉 예정인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두 번째 파트]를 비롯해 여러 작품이 그의 음악을 기다리고 있다. 음악 팬으로서는 새로운 사운드트랙만큼이나 공연에 대한 기대가 크다. 앞으로도 그가 세트리스트를 업데이트해가며 라이브 투어를 지속하길 바란다. 기왕이면 한국에서도 매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