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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ma Ward Jan 29. 2017

한국에서 20대 후반 여자로 살아가기

I ask you that you support me.


# 간만에 유부녀 친구를 만나서, 마음을 절절하게 하는 한 마디를 들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결혼해서, 자신보다 항상 바쁜 남편을 챙기고, 자신의 일도 병행하며 숨 가쁘게 달려온 친구. 그 친구가 담담하게 말한다.

'나도 가끔 아내가 필요해.'

 '나도 내가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해.'


부족함 없는 아내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해온 친구의 삶을 알기에, 자신도 자신 같은 아내가 필요하다는 친구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많은 IT 직군에 종사하는 다른 친구에게서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내 회사에선, 남자가 여자 외모 평가하는 거, 일련의 비하하는 말들이 너무 일상적이야.'


가령, 여자 사원인 내 친구에게 직급이 한참 높은 남자 윗분이 부탁한다.

"00 씨, 옆팀에 이 자료 좀 부탁해봐. 00 씨가 애교 한 번 떨면 쉽게 해 줄 것 같아서 그래."


남자 직원들이 우르르 담배 피우러 밖으로 나가면서 내 친구에게 한 마디씩 한다. "00 씨는 담배 안 피워? 심심하니까 같이 나와서 펴."


남자뿐만 아니라, 같은 여직원에게서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00 씨, 외모 좀 더 신경 쓰고 다녀야겠다. 회사 너무 편하게 다니는 거 아니야?"


# 얼마 전 마스다 미리의 만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연출한 영화를 보았다. 대기업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30대 중반 마이 짱은 일상적으로 남자 상사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오늘 피부가 푸석하네~ 관리 좀 해야겠다."

"마이 짱이 미팅 좀 같이 나가줘. 마이 짱이 웃음 한 번 지어주면 일이 더 잘 풀릴 것 같아서 그래."


상사의 이런 부탁에 같이 나간 미팅에서, 그보다 더 높은 남자 상사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마이 짱 요새 더 이뻐졌네? 다른 미팅에 마이 짱도 참석할 거지? 혹시 알아 마이 짱? 미팅에서 재벌 남자라도 만나게 될지? 하하하"


프리랜서인 30대 사와코 상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 남자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부모님이 손주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 그래서 미안한데, 임신 가능 진단서 떼올 수 있어?"

화가 참을 수 없었던 사와코 상은 맞받아친다. 

"그럼 너도 받아와야지, 왜 나만 받아야 돼?"


# 한국에 있는 집, 직장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외국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한국에서 내가 20대 후반 여자로서 받아왔던 일상적인 '폭력들'이 새삼 재조명된다. 나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닐 동안에는 오히려 크게 인지하지 않았다. 아니, 알았다 해도, '원래 다 이런 거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라는 태도로 살아왔다. 한국을 나와서 보니, 한국이란 사회가 여자에게, 특히 20대 후반 여자에게 직간접적으로 가하는 일련의 모든 태도들은 내 또래들의 영혼을 아주 서서히,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를 포함해서.


일상적으로 무심한 듯 던지는 폭력적인 발언들이 일상이 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 무뎌지지 않으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여자애'가 되어버리는 문화 속에서, 나의 또래들은 오늘도 무기력해진다.


# 20대 후반이 되면 친구들의 방향이 거진 둘로 나뉜다. 안정적인 궤도 안착형과 궤도 이탈형. 한국 회사를 박차고 나와 해외에서 살고 있는, 궤도를 이탈해버린 나 같은 경우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 야근과 상명하복 문화가 일상인 대기업 문화도 갑갑한데, 여자 사원으로서 다니기는 한층 더한 것 같다. 내가 한국 관련 업무 혹은 한국 기업과 연관된 커리어를 장차 피하려 하는 이유도 이런 문화와 맞닿아 있다. 


# 내가 대기업을 퇴사하고 내가 번 돈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선포했을 때, 보수적인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여자애가 무슨 공부를 또 하려고 해? 이제 취직했으니까 결혼할 사람 찾아서 결혼만 하면 되지.' 취직을 포기하고 국내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돌린 오빠를 전적으로 서포트해주고 있었던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라서 더욱 서러운 발언이었다. 


# 회사든 가족이든 연인이든 부부든,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아니 말로 듣지 않더라도 행동으로 느끼고 싶었던 그것은 아무래도, 이것인 것 같다.

Respect Me.
나를 존중해줘.



# 1월 21일 토요일,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열린 ‘여성 행진’(Women’s March)에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트럼프를 향해 인상 깊은 발언을 했다.

https://youtu.be/sKq0 lAfAIwk

"President Trump, I did not vote for you. That said I respect that you are our president-elect and I want to be able to support you. But first I ask that you support me. Support my sister. Support my mother. Support my best friend and all of our girlfriends. Support the men and women here today that are anxiously awaiting to see how your next moves may drastically affect their lives.

트럼프 대통령에게. 나는 당신에게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내가 당신을 지지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먼저, 당신이 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내 자매를 지지하세요. 내 어머니를 지지하세요.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우리 모두의 여성 친구들을 지지하세요. 당신이 하는 일들이 자신의 삶에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불안해하며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남성과 여성들을 지지하세요."


물론 스칼렛 요한슨은 트럼프의 여성 비하적 발언들과 각종 구설수에 대해 저항하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나는 그녀의 'I ask you that you support me' 부분을 이 곳에도 적용하고 싶다. 폭력적인 발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곳에서 나는 되묻고 싶다. 

First, I ask that you suppor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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