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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an 12. 2024

눈치 챙기지 마세요.

프랑스 어학연수에서 배운 것 눈치보지 않을 권리.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결심했을 때, 내 우선순위는 도시였다. 내게 프랑스는 곧 파리와도 같았으니까 아무리 물가가 비싸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 도시를 정했으니 이제는 어학원을 결정할 차례. 곰곰이 생각했다. 프랑스, 파리, 그다음 소르본. 영화에서도 많이 보고 들었던 프랑스의 대학. 유명세를 떨치는 대학의 부설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알려진 만큼 수업의 질과 환경도 좋을 것이란 기대가 앞섰다. 아니, 그래야 폼이 나니까. 하지만 예산 초과였다. 어쩔 수 없이 파리 내에서 가장 싼 어학원들을 찾아내 가격을 정리했다. 가장 싼 곳은 뭔가 찝찝하니까 두번째로 싼 곳으로 범위를 좁히고 수업 후기들을 추적했다. 가성비가 좋아도 너무 좋다는 추천 글 하나를 열 번쯤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완벽하게 설득되어 어학원 등록을 마쳤다. 소신을 버리고 타협을 택한 무늬만 폼생폼사였다.



파리에 도착하고 이 주 정도는 적응기를 가졌다. 무슨 말이냐면 어학원을 안 갔다는 뜻이다. 파리에 일단 적응을 하기 위한 명목으로 관광을 다니면서 나는 이방인이 된 자유에 하염없이 나풀댔다. 이곳에서는 버스 앞자리에 앉은 두 여학생이 하는 말을 들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카페에서 손을 잡고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들의 말을 들어도 질투가 나지 않았다. 하나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단절된 느낌이 이토록 행복했던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눈치를 봐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 듣고도 모른 척하냐면서 싹수없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곳. 애초에 철저하게 소외되는 곳. 기뻤다. 



그렇게 들뜬 마음을 탑재하고 어학원에 처음 갔다. 파리 중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고층 빌딩에 위치한 학원. 교실에서도 에펠탑이 보이는 완벽한 전망을 가진 곳. 거기까진 좋았다. 반 편성을 마치고 내가 수업을 듣는 교실을 찾아 문을 열었다. 없던 폐쇄공포증이 바람같이 나를 덮쳤다. 여기는 강남인가, 파리인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무관심하고도 경계심으로 무장한 스무 개의 눈동자. 그 사이에서 두 개를 빼고 남은 열여덟 개의 주인은 아홉 명의 한국인이었다. 다른 하나는 물론 프랑스인. 선생님이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문가에 서서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생각했다. 음. 내가 후기를 찾는 사이트는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였다. 한국어로 쓰인 후기를 읽고 올 사람들은 한국인들 뿐이니까. 그건 조회수 1만에 육박하는 글이었는데. 프랑스, 특히 파리로 어학연수 오려는 한국인이 한 둘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결과는 너무나 당연했구나. 당시에는 내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숲이 아닌 나무만 봤구나. 하지만 이미 상황을 벌어진 뒤였다. 

학원에 좀처럼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학원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허사가 됐다. 대충 이랬다. 아침 눈을 뜨면 늦잠을 잔 탓에 여유롭지 않게 커피를 들이켜고 기숙사 문을 박차고 나간다. 뜨거운 커피에 목구멍을 데어도 낯선 거리의 풍경을 한 번 봐주면 고통 따위 스르르 사라진다. 학원에 가는 길도 콧노래가 난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불어 간판을 단 카페와 식당들. 버터향을 유혹적으로 뿜어대는 빵집들. 생김새가 전부 다른 거리의 사람들. 머리색도, 피부색도, 눈동자 색도. 동일함이라곤 없어 보는 맛이 있는 사람들. 꼼꼼히 관찰하는데 넋이 나가 어느덧 눈이 마주쳐도 쏘아보는 기색이 없는 사람들. 한국이었으면 이미 싸움 났을 등골 서린 상황에도 뭘 야리냐고, 볼 일 있냐고 시비 걸지 않고 오히려 윙크를 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을 거쳐 도착한 어학원의 문을 열면 나를 쏘아보거나 무시하는 나의 동족들이 있다. 잔뜩 고양됐던 간지러움이 도망치듯 사라진다. 풀이 죽는다. 물거품이다. 



그래도 교실에는 파비앙이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내가 프랑스에 왔고 불어를 공부한다는 목적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사람. 선생님이었다. 내 양쪽에 앉은 학우들과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할 때, 그는 내가 원래 시력이 나쁜지를 묻는다. 그날은 렌즈 대신 안경을 쓰고 간 날이었다. 다정한 관심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린다. 단어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찝찝함 속에서  ‘위, 위’.라고 대답한다. 그는 멋지다며 ‘슈페!’를 외친다. 그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나는 나를 세뇌한다. 선생님과 나만 있다고 생각하자. 개인 과외를 받는다고 상상하자. 가서 말 한마디라도 더 하고 오자. 자발적으로 눈을 가리자. 그러면 한국인들의 존재는 잊힐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역시나 그건 쉽지 않았다. 폐쇄된 교실 안에 흐르는 숨 막힐 정도의 적막감은 내가 한국인들과 있음을 계속 일깨웠다. 홀로 3시간가량의 원맨쇼를 펼치는 파비앙을 보자 하니 미안했다. 어학원에 왔는데. 10 명의 한국인은 한국어도 프랑스어도 안 하고 묵념만 하고 앉았으니 말이다. 나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최면을 건다. 이건 30만 원짜리 개인 과외니까. 프랑스 파리 한 복판에서 에펠탑이 정면으로 펼쳐지는 강의실 안에서 프랑스인에게 불어 과외를 받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30년 한국 생활이 다져온 사회화 내공이 나의 입술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나를 비웃으면 어쩌지? 나댄다고 미워하는 거 아니야? 한국에서는 보통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잖아. 학생 중에 단 한 명 만이라도 외국인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긴 전부 다 한국인이라서,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보이는데.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초조함은 이 교실 안에 있는 한국인들을 모두 관통하는 듯했다. 모두가 시든 숙주나물처럼 고개를 떨구고 일제히 묵념으로 일관했으니까.  파비앙은 우리의 지나친 겸손함을 다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호명을 해도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을 때조차도 여유롭게 넘겼다. 출석 부른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런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파비앙과 같이 단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진정한 폐쇄의 공간에 남겨진 둘. 비록 30초도 되지 않을지라도 완벽한 개인 교습의 환경. 파비앙은 나에게 괜찮냐며 ‘싸바?’라고 물었다. 나는 답했다.


“괜찮아요. 당신은요?”

“나도 괜찮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미안했다. 오늘도 열 명의 한국인 관중 앞에서 파비앙 원맨쇼를 펼치느라 힘들었을 텐데 싫은 내색조차 없다니. 나는 말을 더듬으며 한 문장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저는 말 안 해요. 수업 시간에.” 

“왜 미안해?” 


문이 열렸고 파비앙은 먼저 내리라며 손을 앞으로 펼쳐 보였다. 나는 고개를 꾸벅 연달아 세 번 숙이고는 궁녀가 상전의 침실을 나서듯 뒷걸음질로 빠져나갔다. 건물 로비에는 진득한 커피 향이 맴돌고 있었다. 아, 필요하다. 카페인. 오늘 아침도 여기서 잘 버텨냈으니까 내게 보상으로 커피를 선사하기로 한다. 조금 사치 부려 라테로 마실까? 모카? 그때 파비앙이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럴 권리가 있으니까. 우리는 유치원에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권리라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는데 그는 이미 ‘아 드망! ‘ 을 외치고 사라지고 있었다. 내일 보자고 손까지 흔들며 가볍게, 아주 멀리 가버렸다. 권리. 권리라니! 역사 시간에나 들어봤던 권리라는 말을 일상 대화에서 아무렇지 않게 들을 줄이야. 역시 원조 시민혁명의 나라는 달라도 다른 걸까? 아무렴 내일부터는 침묵에 대한 죄책감은 조금 덜 수 있겠다.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대며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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