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말하기가 곧 나를 위한 말하기
오늘은 룩셈부르크 국립 어학원의 가을 학기 수강 신청일이었다. 두 달 전부터 기다려온 날이라, “이번에는 꼭 룩셈부르크어 수업을 듣고 말겠다!“며 기대에 차서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음… 1분 만에 모든 수업이 마감되었다. 수강 신청에 실패하는 쓴맛을 본 것이다.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며, 대학 시절의 수강 신청 전쟁이 떠올랐다.
충격으로 부서진 멘탈을 줍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룩셈부르크어 수업이라고 감히 만만하게 봤던 내가 미웠다. 룩셈부르크어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 인구가 적은 소수 언어라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이 이렇게나 몰리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생각보다 시작반이 많이 개설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혹은 여유롭게) 수강 신청에 성공할 줄 알았다는 안일한 생각을 곱씹었다. 소수 언어라서 오히려 더 배우려는 경쟁이 치열한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서의 결론은 이거였다. “아 여기, 내가 사는 곳은 룩셈부르크였지!”
하루는 집 앞 뜨개질 상점에 들어가 무의식적으로 “Bonjour!“라고 인사했다. 룩셈부르크인 직원은 “Moien!“이라고 답했다가 내 인삿말을 듣고 “Bonjour!” 라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앗차 싶어서 그녀에게 다시 “Moien!“ 하고 룩셈부르크어로 안녕을 건넸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뜨개실을 굳이 몇개 더 사서 나오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이곳에서 프랑스어가 주언어처럼 쓰이고 모든 이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룩셈부르크어, 즉 그들의 모국어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해온 건 아닐까. 그들이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그들이 모국어로 대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 아주 작은 디테일일지 모르지만, 커다란 차이를 만드는 섬세한 마음을 놓치고 있었다.
내가 룩셈부르크에 살면서도 이 나라의 말을 배우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구나, 하고 인식하고 나니 뭔가 빚진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자기네 나라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접근성을 낮춰주고 또 한국어 수업도 들어주며 같이 한국어로도 대화해주는데, 나는 특히나 룩셈부르크인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중요할 그들의 언어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구나, 하는 미안함에서 나온 빚이었다.
그 후로 나는 기초 룩셈부르크어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 “좋아요” 같은 간단한 표현들부터 연습했다. 그렇게 인사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하게 웃어 준다.
어제 개강한 한국어 단체 수업에서 나는 7개 이상의 다양한 국적으로 이뤄진 20명 가량의 학생들을 만났다.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왜 공부해요? 라는 진부하고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20명의 19명은 아마도, 한국 드라마와 음악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나는 그들의 대답을 듣고 오른 손을 들어 엄지를 치켜 세웠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좋으니까 하는 것처럼 멋진 일은 없어보였다. 영문도 모른 체 내게 실용적이지 않아 아웃을 당했던 안드레아보첼리가 나를 바라보는 거 같아 민망하긴 했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걸 주세요.
2시간 수업 중 1시간 30분 쯤 흘렀을 때였다. 수업 내내 필요시 가끔 프랑스어를 곁들여 설명을 했다. 우리 반에 있는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4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고 공통 언어로 프랑스어가 포함이 되길래 당연히 프랑스어로 설명을 했던 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학생이 영어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었다. “영어가 더 편해요?” 다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왜요? 프랑스어가 더 편하지 않아요? 여긴 프랑스어권이고, 여러분도 다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요. 다들 모국어처럼 프랑스어를 구사하잖아요.” 그랬더니 아까 그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영어도 편해요. 회사에서 주로 영어를 써요. 이제는 영어가 더 익숙해요.”
룩셈부르크에는 워낙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섞여 살다 보니,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일상에서 주로 구사하는 언어는 영어인 모양이었다.
아, 그럼 그대들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 온 나의 프랑스어는 어쩌나! 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영어를 겸해서 설명했다. 그래도 결국 한국어 수업이니까, 학생들이 한국어에 익숙해지도록 점차 한국어로 전환해 갔다. (사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지만, 한국어로만 설명을 하니 그들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는 걸 나는 봐 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영어를 곁들였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언어를 배운다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능력 만큼이나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단순히 나를 표현하는 언어를 넘어서서 말하는 나와 듣는 상대가 함께 이 순간을 함께 나누기 위해 매개가 되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 그 중심에 상대를 두려는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그 사람에게 알맞는 표현으로 건네야만 한다.
어쨌든 그래서 이제 나는 어디서 룩셈부르크어 수업을 들어야 할까?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힘껏 닦고 검색을 재개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학습 의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