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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miLuna Sep 19. 2021

한 밤 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핀란드의 선한 사마리안법

9월 중순, 핀란드는 벌써 아침 기온 6-7도로 한국 기준 초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다. 어둠이 찾아오는 시각도 점점 빨라져 노아(반려견)의 마지막 산책 시간인 9시-9시 반이면 정말 캄캄한데, 한국에서야 원래도 캄캄할 시각이지만 이곳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백야가 있었으니 아직 심적으로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매일매일의 이런 변화가 여전히 낯설다.


내가 사는 Espoo 내 지역은 꽤 조용한 주택가다. 영화 가위손에 나오는 미국의 마을처럼 반듯반듯한 모양은 아니지만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개인주택들이 생겨나 있는 조용한 주택가인데, 곳곳에 숲들도 있어 밤 9시 정도 되면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동네이다. 평소 범죄 뉴스 하고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바비큐가 한창인 여름에도 술 먹고 고성이 오가는 작은 말다툼도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다. 


어제도 평소처럼 노아를 데리고 숲길을 걸어 주택가로 나오는 코스로 30분 정도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데 우리 집 앞에 많이 본 남자(=남편)가 서성이고 있는 걸 봤다. 시끄러울까 봐 가까이 다가갔을 때까지 부르지 못하고 서서히 다가가는데 왠지 모르게 뭔가 초조해 보인다. 가까워졌을 때 남편이 오는 길에 젊은 여자를 마주치지 않았느냐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숲길에서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너무 조용한 나머지 노아에게 한국말로 열심히 떠들며 머릿속으로는 이런 곳에서 만약에 습격을 당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땐 핀란드 말로 "도와달라"라고 소리쳐야 하나, "불이야~"라고 고함을 질러야 하나 고민을 하며 걸어왔던 터라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남편이 막내를 재우고 부엌에 나왔는데 어디선가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막내가 아빠 나갔다고 우는 소리인가 싶어 막내 방에 다시 들어갔더니 막내는 아니었어서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우리 방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더니 젊은 여자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얼른 문을 열 수 있는 거실 쪽으로 달려가 봤는데 더 이상 여자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큰 아이에게 이야길 하고 본인은 나와서 여자가 있었던 곳을 비롯하여 집 주위 마당을 돌고 나와 있는 중이라고...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추측들이 떠올랐고 나 역시 노아를 데리고 마당에 가서 다시 한번 anyone there?를 외쳐봤다. 들어와서 걱정하고 있는 큰 아이들과 무슨 일이었을까를 이야기해 보면서 점점 더 무서운 생각들이 들었고, 그동안 문도 안 잠그고 다녔던 것을 떠올리며 급하게 닫히면서 자동으로 잠가지도록 바꾸어 놓았다(웬일인지 모르겠지만 핀란드에서는 게이트맨과 같은 디지털 도어록을 잘 안 쓴다. 그래서 여전히 열쇠를 갖고 다닌다. 게이트맨은 심지어 옆 나라 스웨덴 기업인 ASSA Abloy 회사다.). 어찌어찌 애들은 안심시켜 자게 하고, 남편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걱정은 가장 먼저는 우리 집 대문 쪽도 아니고 옆쪽에 있는 마당 깊숙이 돌아와 우리 침실 옆 창문까지 들어온 "침입자"였고, 두 번째는 그 침입자가 그곳으로 와야 했던 "상황"에 대한 우려였다(이제 우리 동네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인가?). 내 이기적인 마음에서는 우리 가족에 대한 안전과 보호가 최우선이었지 젊은 여자가 울고 있었던 상황과 그 여자의 안전에 대한 걱정은 그다음이었을 뿐이다. 반대로 남편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이미 안전하고 지금의 최우선 문제는 그 여자가 안전한지,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제대로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었는지, 우리가 제때 도와주지 못해서 더 위험해지게 되었다면 그거야 말로 우리의 크나큰 잘못이고 책임이라는 생각이었다. 난 심지어 무슨 갱 집단에서 여자를 미끼로 먼저 문을 열게 하고 당신이 나갔을 때 남자들이 나타나서 공격해 오면 어떡하냐라는 황당한 이야기도 했고 (아... 날이 밝고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생각은 어찌나 부끄러운가..), 남편은 내가 너무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봐서 그렇지 그건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본연의 인간성 (휴머니티?)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이 되는 바람에, 일단 지금으로서는 우리는 알 수 없고, 분명한 사실은 여자가 창문을 두드렸다 정도이므로 그냥 자자로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난 투견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는 악몽을 꿨고 다행히 남편이 잠결에 중얼거리고 있는 나를 깨워줘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서울에 함께 살 때에도 몇 번인가 지나가다 목격한 커플의 싸움(남자가 위협적으로 행동하려 했던)에서 남편이 남자를 적극적으로 말렸던 것이며, 무섭기로 유명한 한국의 중학생들의 다툼을 중재하려 해서 내가 잡아끌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왕왕 목숨을 잃었다는 젊은 가장의 이야기들을 뉴스에서 접했던 지라 남의 일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나는 오만가지 걱정이 드는데, 이 남자는 핀란드 사회와 휴머니티에 무한 신뢰가 있는 것인지 먼저 약자를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야구방망이를 들고나간 들 자기가 탐 크루즈도 아니고 어떻게 싸울 수 있겠냐며 어찌나 이성적으로 맞는 말씀만 하시는지... 


내친김에 일어나자마자 선한 사마리아인법을 찾아봤다. 이건 분명히 핀란드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고상한 휴머니즘 외에 뭔가 법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사람들이 다르게 행동하게 하는 것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역시나 독일, 핀란드, UK 등 많은 유럽의 나라에서는 다친 사람을 돕다가 더 악화되거나 사망에 이를 때 형. 민사상 처벌을 면제한다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고 방조하였을 때 책임을 묻고 벌을 받게 하는 적극적인 법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사망에 이르렀을 때에는 형사책임만 면제되고 여전히 민사상으로는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법 쪽으로 전문가는 아닌지라 잘은 몰라도, 요즘 한창 이런 "시민의 책임, 관련 기본 법들"에 대해 배우고 있는 중3 큰 아이가 어제 호들갑 떠는 나에게 "엄마, 이런 상황에서 무시하고 도움 안 주면 우리 처벌받아요"라고 말하는 걸 보고,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고 법적으로 뒷받침이 된다면 남편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아침에 열쇠 갖고 다니기 귀찮다며 다시 대문 락을 풀고 안 잠그고 다니자는 남편의 제안에 위험해서 안된다고 게이트맨 달자며 휘리릭 알아보니 설치비까지 4-500 유로는 드는 것 같다. 

음 그냥 이 사회를 믿고 열어놓고 다녀야겠다. 어차피 창문도 많고 출입구도 많아서 대문만 바꾼다고 기왕 침입하려 맘먹은 사람을 막지는 못할 테니. 


어느 사회나 백 퍼센트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냥 다를 뿐. 그 차이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어찌 되었건 "이놈의 나라는 왜 이래?"라는 불평은 안 하게 되니, 역시 나의 키워드는 growth mindset 인가보다. 그나저나 그 여잔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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