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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wan Dec 19. 2018

동양인, 유럽의 이방인

프라하에서의 일주일

프라하에 온 지 오늘로 6일째다. 어제는 아침부터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힘들었다.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시기가 반드시 오는데, 나이가 들수록 체력 고갈의 속도가 빨라지는 거 같아서 좀 슬펐다. 나이에 맞는 여행을 할 줄 아는 것도 여행의 기술인데. 하나라도 더 보려고 욕심을 내다가 더 많은 걸 놓칠 수도 있으니. 


진저케이크 맛이 꽤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너무 달아서 반은 남겼지만.


체력이 바닥에 있었던 어제 점심, 카페에서 라테를 시켜놓고 두 시간쯤을 보냈다. 무의식적으로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동양인인 나는 이 도시의 소수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현저하게 다른 외모만으로도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피곤이 더해졌다. 


엊그제 환전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국가별 환율을 표시해둔 전광판을 확인하고 가는 외국인(자세히 말해 서양인)들이 들락날락 오갔다. 돈을 바꾸지는 않고 전광판만 확인한 채 돌아서는 그들은 실망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들도 다 이 도시의 이방인이란 뜻이겠지. 각자의 이유로 현재 프라하에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나라의 돈이 이 나라에서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는지 매일매일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지녔던 모든 가치를 타지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이방인이다.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으면 맞은편에 서점이 보인다. 그리고 저 서점은 노다지다.


카페에서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예매해둔 오페라 <팔려간 신부 Prodaná nevěsta>를 보기 위해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격식 있는 자리에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온 게 무안해 직원에게 겉옷을 따로 보관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직접 안내하며 내 좌석과 옷을 걸어둘 수 있는 곳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물었다. '코리아'라고 답했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몹시 캐주얼한 차림으로 국립극장에 오페라를 보러 와도 따가운 눈총 대신 친절과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건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당연한 문화를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도 된다는 관용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고 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생애 최초 오페라 라이브 공연 관람. 프라하에서 제일 잘한 일.


나의 옷차림이야 어쨌든, 오페라는 기대 이상으로 대단히 훌륭했다. 그리고 오페라가 끝나던 시간에 맞춰 약속이나 한 듯 민박집 스탭 S양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 제가 파스타 했으니까 주방에 내려와서 같이 먹어요!'

이럴 수가, 마침 저녁으로 며칠 전부터 당겼던 파스타를 먹고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괜찮아요. 고마워요' 정도의 인사로 사양했겠지만 파스타라지 않는가! 평소 같지 않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30분 안에 숙소로 들어갈 테니 조금만 남겨 줄래요?'

'그럼 식어서 맛이 없어요. 소스만 사 오시면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그 길로 마트로 향했다. S양은 평범한 토마토소스로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숙소 주방에 한상 차려놓고 맥주를 마시며 수다스러운 밤을 보냈다.


그렇다, 이 식탁의 주인공은 맥주다.


한국에서라면 전혀 만날 일이 없을 S양을 프라하에서 만나 단 하루 이틀 만에 이토록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우리가 '프라하에 머무는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 아닐까. 오늘만큼은 이방인이어서 참 다행인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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