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자리 잡은 한국의 얼굴
한국인 여행객으로부터 외면받지만, 거주자에게는 각광받는 곳. 도쿄에 살면서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는 일본 최대의 한인타운, 신오쿠보다.
만남의 장소인 JR신오쿠보 역에서 내리면 한글 간판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발음이나 뜻을 해독할 필요 없는 한글은 답답한 외국 생활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존재다. 오쿠보 거리와 쇼쿠안 거리, 이케멘 거리로 구성된 메인 스트리트에는 음식점과 술집, 한인마트, 화장품 가게, 한류샵 등 500여 개의 상점이 빽빽하게 들어서있다. 한국에서 즐겨 먹던 치킨 브랜드나 식당 체인점이 하나 둘 신오쿠보에 입점할 때마다 도쿄에 사는 한국인 부부의 주말 계획도 풍요로워진다.
일본의 수도인 도쿄, 그것도 중심가인 신주쿠구에 이처럼 번듯한 한인타운이 형성된 데에는 오랜 이주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 살면서 한국의 말과 글, 맛과 정취를 잊지 않은 한국인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신오쿠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도쿄 생활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던 신오쿠보를 다루면서, 한국의 젊은 세대가 잘 모르는 '일본 속의 한국인'이야기와 한인타운의 변천사를 알아보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팍팍하다. 어느 한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를 넘나드는 일은 어쩌면 해외에 사는 모든 사람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사전적으로는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지만, 재일교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넘어간 약 200만 명의 조선인 중 독립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60만 명과 그 후손을 뜻한다. 일본말로는 ‘일본에 있다’는 뜻에서 ‘자이니치(在日)’라고 불린다. 일본은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이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지만, 1965년 한일협정과 1991년 법제도 개정 등을 통해 '특별 영주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투표권은 없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일본 사회 주민으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그 후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이 2016년 기준으로 약 45만 명, 사실장 무국적인 '조선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약 3만 명에 이른다. 일본의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동화되지 않은 한국은 불과 몇 년 전까지 해외영주권자라는 이유로 주민등록번호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2015년부터 시행된 '재외국민 주민등록증' 제도 덕분에 한국 국적 유지자는 주민등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재외국민 투표도 가능해졌다.
사실 재일교포든 재외국민이든 한국을 떠나온 시대와 역사적 배경이 다를 뿐 다 같은 한인 동포(Korean Diaspora)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정체성이나 경험에 큰 차이가 있으므로 전문가들은 이주 시기를 기준으로 '올드 커머(Old Comer)'와 '뉴커머(New Comer)'로 나누기도 한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과 국교정상화 전에 일본에 갔다면 올드 커머, 그 후라면 뉴커머인 것이다. 특히 후자는 1980년 후반 해외여행과 유학이 자유화되며 급격히 증가했으며, 요즘은 취업을 위해 일본에 오는 한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뉴커머가 지금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공부하고 일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멸시와 차별을 견뎌낸 재일교포와 올드 커머의 공헌이 클 것이다. 불과 한 세기 동안 식민지배와 독립, 전쟁과 분단,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오롯이 겪은 그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기에, 이주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국의 모습도 판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라는 역사적인 뿌리가 같다는 사실은 개개인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모두를 이어주는 끈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0년대 초 한류의 시작과 이수현 신드롬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한국인이 모여 살았다는 신오쿠보 주변에는 1980년대부터 한국 음식점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가인 가부키초를 중심으로 발달하다가 2000년대 초 한일 월드컵과 드라마 <겨울 연가> 열풍에 힘 입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2001년 1월 26일, 신오쿠보역 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고 이수현 씨의 희생도 한국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각을 바꾼 계기가 됐다. 어학연수 중인 20대 외국 청년이 자국민을 구하고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이자 감동으로 울린 것이다.
그 후에 신오쿠보역에는 철로에 떨어졌을 때 몸을 피할 구 있는 대피 구와 고 이수현 씨 추모비가 마련되었으며, 지금은 스크린 도어도 설치되어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이수현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추모행사와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를 포함한 기념사업이 줄이었으며, 장학재단도 설립됐다. 살아 있다면 정의감과 인류애, 지성을 갖춘 40대가 되었을 고 이수현 씨에게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늘 빛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한류와 혐한을 오가는 2010년대
내가 처음 신오쿠보역을 밟은 것은 도쿄에 교환학생으로 온 2010년이었다. 되돌아보면 그때가 신오쿠보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주말에는 역 주변을 인파에 휩쓸리듯 걸어 다녀야 했고, 가게마다 몇십 분씩 줄을 서야 했다. 카페에서 한국인끼리 수다를 떨고 있으면 처음 보는 일본인이 동방신기(東方神起) 팬이라며 말을 걸 정도로 한국 콘텐츠와 음식,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불과 5년 뒤 대학원생이 되어 다시 찾은 한류의 얼굴, 신오쿠보는 예전 같지 않았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여 일왕의 사죄를 요구하자 ‘한국을 혐오한다’는 뜻의 혐한(嫌韓) 정서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서점가에는 한국을 비판하는 책으로 뒤덮였고, 한국을 배척하는 수많은 시위대가 신오쿠보를 짓밟았다.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 없이 시청각적인 즐거움에만 취했던 애정이 혐오로 변질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여파로 신오쿠보의 터줏대감이었던 여러 한식당과 한류샵이 문을 닫았고, 동시에 수많은 한국인이 생업을 잃었다. 최근 차별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혐한 서적과 시위는 줄었지만, 인터넷이나 방송에서는 여전히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처럼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한일 관계에도 불구하고 2017년부터 젊은 일본 세대를 중심으로 한류가 다시금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다름 다닌 9인조 걸그룹인 트와이스(トゥワイス)와 치즈 닭갈비(チーズタッカルビ).
트와이스는 매력적인 노래와 실력, 비주얼뿐 아니라 일본 멤버가 1/3이라는 친근함을 무기로 일본 시장을 파고들었다. 데뷔 앨범은 출시와 함께 첫 주에만 20만 장이 팔렸고 오리콘 차트를 비롯한 각종 순위에도 한 달 동안 5위 안에 머물렀다. 또 평균 시청률 40%가 넘는 일본 연말 프로그램인 NHK <홍백가합전>에 한국 가수로는 6년 만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한편, 신오쿠보의 <시장 닭갈비>가 원조라고 알려진 치즈 닭갈비는 2016년부터 일본의 여자 중고등학생 인스타그램을 타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닭갈비 소스는 일본인 입맛에 맞춰 맵기를 줄였고, 부드럽고 고소한 치즈는 듬뿍 넣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2017년 각종 일본 매체에서 올해의 유행어에 꼽힐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치즈 닭갈비는 이제 대부분 한국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는 메뉴가 됐다. 한국의 원조 닭갈비를 좋아하는 나는 맹숭매숭한 맛과 풍미 없는 치즈에 실망했지만 말이다.
날 선 외교 관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신(新) 한류 열풍은 정치나 역사 문제가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혐한 열풍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두 나라가 주기적으로 갈등을 반복하는 사이에 신오쿠보와 그곳에 사는 한국인은 또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을 겪어야 할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일본의 풍경과 문화가 좋아 도쿄에 왔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한식을 먹고 자란 나와 내 남편은 매 주말 이끌리듯 신오쿠보를 찾는다. ‘고향의 맛’이 그리운 한국인은 물론 '현지의 맛'이 궁금한 일본인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장소를 몇 군데 모아봤다.
요프 임금님의 소금구이 ヨプ の王豚塩焼
비교적 깔끔한 분위기의 삼겹살집으로 이와테현 숙성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내놓는다. 치즈 닭갈비가 최근에 급부상하긴 했지만, 삼겹살(サムギョプサル)이야말로 진정한 한식 스테디셀러가 아닐까 싶다. 직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워주는 시스템과 다양한 반찬, 그리고 도쿄에서 보기 힘든 명이나물도 장점이다.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오쿠보 1-16-21
전화: 03-3202-3852
영업시간: 11:00~24:00
굽네치킨 신오쿠보점 グッネチキン 新大久保本店
나의 소울 푸드는 뭐니 뭐니 해도 치킨이다. 어렸을 때부터 브랜드 없는 동네 치킨집과 길거리에서 파는 전기구이 통닭을 좋아했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교촌치킨 오리지널과 굽네 오븐구이 치킨, 네네치킨의 파닭과 스노윙을 번갈아 가며 먹었다. 그중 도쿄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은 굽네치킨뿐. 그윽한 향과 부드러운 육질이 특징인 오리지널은 한국에서 먹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주소: 도쿄 도 신주쿠 구 오쿠보 2-32-1 2F
전화: 03-6273-9496
영업시간: 11:00~24:00
홍콩반점0410 香港飯店0410
국내 요식업계의 전설인 백종원 대표는 신오쿠보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신오쿠보 한식당은 김밥천국만큼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지만 천편일률적인 맛과 허름한 분위기가 아쉽다. 그래서인지 새마을식당과 본가, 홍콩반점0410, 백철판 등 전문성과 트렌디함을 겸비한 백종원표 식당이 인기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자주 이용하는 곳은 홍콩반점인데, 명실상부 한국발 중식인 짜장면과 얼큰한 짬뽕은 언제 가도 실망스럽지 않다.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 2-19-10
전화: 03-6265-9952
영업시간: 11:00~23:00
장터 한국광장 韓国広場
일본 마트에서는 찾기 힘든 다진 마늘과 깻잎, 다진 마늘, 된장 등의 식재료를 사기 위해 주기적으로 찾는 곳. 과자와 인스턴트 라면, 한국 소주도 단골 쇼핑 목록이다. 장터 한국광장은 JR신오쿠보역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만큼 더 넓고 사람이 적어서 장보기 편하다.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 2-31-11
전화: 03-3232-5400
영업시간: 8:00~24:00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어느 주말, 활기 넘치던 신오쿠보의 길거리를 걸으며 지금과 같은 평화가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일본을 찾았을 모든 한국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일본인에게는 가까이서 한국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언제까지나 수행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다음 세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관계를 개선해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신오쿠보는 더 이상 한류나 혐한이 아닌, 화해의 상징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