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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ikos Jun 22. 2015

무라카미 하루키와 두 세계 이야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책에 빠지기 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제법 찾아 읽었다. 글 쓰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는 소설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작가란  무엇인가?>와 같이 에세이나 그의 인터뷰가 실린 글을 통해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는 마치 그가 소설 속에서 꾸준하게 두 세계를 등장시키고, 두 세계의 인물을 조우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상반된 하루키의 매력을 드러낸다.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1Q84> 그리고 이 책까지 그의 소설과 단편, 그리고 반전의 매력을 보여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개념이 조금 잡히기 시작했고, 그가 말하는 두 세계를 고민하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소설에는 항상 두 개의 세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세계가 서로 교차되며 묘사되고, 두 개의 세계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주인공들이 서로 우연히 혹은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조우하게 되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서사구조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의 공통점이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소설 <상실의 시대>만이 유일하게 이런 방식과 차이를 갖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리얼하게 현실세계를 반영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에겐 두 세계가 필요할까? 나는 어쩌면 이것이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한 영원회귀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쿤데라는 "우리의 세계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살 수 없으므로 한 번의 실수란 의미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사는 우리는 실수투성이일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다. 


하루키는 그러니까 현실 세계와 다른 신비로운 세계를 만들어 그 세계에서 풀 수 없는 숙제를 다른 세계와의 조우를 통해 풀고자 한 것이다. 두 번 반복해서 살 수 없는 이 세계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다른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풀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어떤 내용인가?

이름에 색과 관련된 한자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인정받고 주위에서 사랑받는 친구이다. 그러나 대학교 2학년 여름, 다섯 손가락처럼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던 그의 친구들에게서 일방적으로 따돌림당한다. 이 일방적인 관계의 단절로 인해 삶이 변해버린 그는'사라'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느끼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외면당했던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로운 인물은 하이다 후미아키다.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깊이 사귄 2년 후배인 후미아키는 신비로운 인물이며, 소설 속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 역시 이름에 '회색'을 의미하는 한자가 있고,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수영(하루키는 수영과 마라톤을 좋아한다.)을 한다. 


후미아키는 <1Q84>의 남자 주인공과 조우하는 소녀(이름이 가물가물....) 같은 인물이다. 다른 세계의 인물 같고, 다자키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그와 동시에 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다자키는 시로와 관계하는 꿈을 꾸고 사정을 하는데 그 사정을 입으로 받아주는 인물이 또 후미아키다. 그것은 다자키 내면의 문제를 털어놓는 계기이며, 시로와의 문제의 해겨이다. 후미아키는 그의 아버지가 겪은 신비로운 얘기를 들려주는데 그것이 다자키가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던 이유인 '시로'가 겪었던 이상한 경험의 실마리가 된다.


그래서 도대체 무얼 읽은 것인가?

소설가 김영하는 그의 책 <말하다>에서 한류와 관련해 무라카미 하루키를 언급했다. "하루키는 일본문학과 미국 문화를 혼합한 그만의 색깔의 소설을 창조해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인종과 문화를 넘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상의 여지가 그를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이고, 한류문화 또한 그러한 혼종(?)의 혹은 퓨전의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한류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김영하는 주장했다. 하루키가 그의 소설에 두 세계를 등장시키는 것은 김영하가 말하는 바로 이러한 혼합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혼합. 혼종. 퓨전. 섞임. 통섭.


우리는 언제나 이분법적 사고로 세계를 해석한다. 보수와 진보, 자유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독재. 자본가와 노동가. 사람과 사회. 흑과 백. 나와 너.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렇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문제를 이 세계와 대립하는 또 다른 어떤 세계에서 해결할 수는 없을까? 이 세계와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해보면 어떨까? 그 세계를 통해 우리 세계의 한계를 없애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세계의 문제를 그 세계의 해법과 혼합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한 세계의 혼합과 혼종의 결과가 각자의 세계에서 독립적으로는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마치 하루키의 문학을 전 세계의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우리 세계와 다른 어떤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그 세계는 만들어진다. 과학을 상상해서(사이언스 픽션)이 현실이 되었고, 사회를 상상해서(소셜픽션)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처럼, 현실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고, 표현하기 시작하면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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