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과의사 호빵맨 Jul 25. 2019

포정해우



“우리 각자는 진리 주위에서 자신의 포물선을 그린다. 비슷한 두 궤도는 없다. 이 궤도 일치는 우리가 바보 만들기라고 불렀던 그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궤도 위에 있지 않는 한 아무도 진리와 관계 맺을 수 없다. 그는 그 길 위에서 몇가지 진리를 얻는 것이다. 진리는 자기 자신의 친구일 뿐이다.”

-. 자크 랑시에르 1987 『무지한 스승』


 

장자의 양생 주편에는 빼어난 칼잡이 포정이 등장한다. 백정 포정이 소를 잡을 때 힘이 전혀 들지 않고, 물 흐르듯이 음률에 맞게 일을 했는데, 그 광경을 본 주군인 문혜군이 그 비결을 묻었다. 이에 ‘뼈마디에는 천리에 따라 틈새가 있고, 제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솜씨 없는 칼잡이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틈새가 없는 곳으로 향한다. 근육과 뼈를 억지로 갈라서 칼날이 상하고 자주 바꿔야 하지만, 포정은 해부학적 구조의 ‘결’대로 칼을 썼기 때문에 때문에 19년간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그의 칼날은 방금 숫돌과 간 것처럼 날카로웠다. 이 고사에서 비롯되어, 어느 분야에 달인의 경지에 이르러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자랑할 때, '포정해우(庖丁解牛)'라 일컫는다.


사람의 일인 수술도 포정의 말대로 틈새에 따라 선을 긋는 일부터 시작한다. 태생기에 기원이 다른 장기들이 서로 만나 차곡차곡 붙어있는 곳에는 성긴 조직만 있고, 중요한 혈관은  지나가지 않는다. 장기 사이의 이런 무혈관의 3차원의 연속선을 따라가야 출혈이 없는 안전한 외과적 절제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직장암 수술을 현대화했다는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의 외과의사 힐드(Dr. Richard J. Heald) 선생님은 직장암 수술에서 발견되는 이 공간을 ‘Holy plane’이라고 성스럽게 명명했다. 이 숨겨진 절제면을 따라가는 수술을 해야 오류가 생긴 인간을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안전한 절제면은 수술에 따라 간격이 너무나 얇은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종이 한 장의 물리적인 차이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기도 한다. 이 선의 이쪽에는 출혈, 합병증, 혈관외과의사, 금식, CT, 중환자실, 멱살잡이, 소송, 재발, 그리고 죽음이 줄지어 서있고, 다른 한편에는 깨끗한 수술, 환한 미소 미소, 퇴원, 감사, 선량한 보호자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들은 대개 줄지어 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과 저쪽의 세계가 서로 중간에서 엇갈리기도 한다.  

 

외과 의사들은 수련 기간 동안 하는 일은, 참여하는 수술에서 끝없이 많은 이 자유형 선들을 지겹도록 보는 일이다. 이 선들은 어떤 객관적인 수치와 지표로 표현되기보다는, 많은 부분이 ‘천리’라는 선험적인 것들로 규정되는데, 수없이 많은 선들이 겹쳐서 마침내 하나의 곡선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으면 외과 의사의 수련은 거의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스승보다 내가 낫다는 '오만' 때문에, 외과의사의 나름의 선은 조금씩은 다르다. 이런 자유의지와 오만함은 의학과 수술의 눈부신 진보를 현재에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때문에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완벽한 수술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장기에 따라서 선 긋기 즉 절제술만으로 수술이 끝나는 경우가 있고, 후반 작업이 필요한 곳이 있다. 파괴된 조직의 부피를 단순하게 되살리는 일이나, 그보다 더 나아가 끊어진 장기를 다시 연결하는 ‘문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능을 보존하는 일들이 후반 작업들이다. 이런 작업들을 꼭 해야 하는 외과의들은, 수술이 없는 과를 부러워하는 정도만큼이나, 외과 내에서도 무엇인가를 연결하는 수술이 없는 파트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외과의사와 환자의 ‘갑을관계’가 대개 이 후반 작업의 성패로 갈리기 때문이다.

 

환자 몸에 칼을 대기 전까지는 치료법을 가진 의사가 ‘갑’, 병을 가진 환자가 ‘을’이다. 이 관계는 병의 중증도와 응급 여부에 따라 과장되고 확대된다. 이후 수술이 끝난 후 결과를 알 수 없는 몇 일간의 막막한 터널을 지나는 동안은 환자가 ‘갑’, 의사가 ‘을’로 일시적인 역전이 생긴다. 솜씨가 아무리 빼어나고 큰소리치는 의사라도 수술 후 이 불안한 터널을 지나는 기간에는 예측 불가능한 여러 가지 변수들 때문에 ‘수동 공격형을’ 일뿐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환자가 별다른 문제없이 회복하여 의사가 퇴원 날을 당당하게 통보하는 시점에서 완전하게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퇴원 날을 환자나 보호자가 ‘함부로’ 정하는 것을 외과의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후기 합병증이나 재발이 생기기 전까지는 비교적 잘 유지된다.

 

지금 병동에는 내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각각의 다른 선들로 수술을 한 환자들이 있는데, 이 환자들과 나의 갑을관계의 수준을 나름의 비모수적 방법으로 분석을 했을 때 비교적 ‘을’의 기간이 길다. 포정의 도를 깨치지 못한 나는 노자의 말처럼, 수술이라는 비대칭적으로 합의된 폭력이 한없이 두렵고, 또 조심할 뿐이다.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작가의 이전글 맹장 수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