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읽는 일,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일, 진정한 사랑의 독서는 손을 만지는 듯한 물질적인 감각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만지듯이, 문장과 단어를 감촉하고, 행간과 여백의 파동을 느끼고, 애매성과 함축에서 들려오는 여러 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진정한 독서는 사랑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 김행숙, 2016 『사랑하기 좋은 책』
진료 외의 시간에 책상에 앉아 이메일을 읽고 쓰는 일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이메일을 통해 일을 받고, 분배하고, 부탁하고 다시 취합한다. 사무적인 내용에서부터 개인적인 내용까지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들을 만난다. 이메일은 내가 빈틈없고 쉼 없이 일하고 있다는 근무상황부다. 그런 의미에서 종종 사용하는 예약 메일 발송은 조기 퇴근자의 방만함을 성실한 파수꾼으로 탈바꿈시켜주는 훌륭한 마법이다. 하루에 수십 통의 메일이 오는데, 잠깐 방심하면 스마트폰까지 끈질기게 따라와 읽어달라고 숫자를 들이밀면서 아우성을 친다. 세상천지에 부모님이 아니고서야 나에게 먼저 좋은 일과 도움을 주려고 연락하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이 숫자는 마이너스 통장의 숫자만큼 클수록 괴로운 숫자다.
상당한 거친 화법을 구사하지만, 이메일로는 따뜻한 존대어로 자상한 분으로 보이는 분이 있다. 내가 그분의 깊은 뜻까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분의 이메일 예의는 참 바르다. 글이라는 것은 한번 써서 남에게 내보이면 고치기가 어렵고,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기에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써야 한다. 보내기 전에는 두세 번을 읽어보고 맞춤법 검사를 하는 것은 너무도 기본적인 일이다. 형식이 내용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강의 섭외 건으로 통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유명인 K 박사의 사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분이 어떻게 저런 수준의 이메일 매너를 가졌는지 큰 실망을 했다. 일방적이긴 하지만, 내가 사준 책이 벌써 몇 권인데. 긴 부탁의 메일에 답장이라곤 고작 한 줄이라니. 이런 거기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은 물론 스스로에 대한 존중도 없고, 단지 느껴지는 것은 안하무인에서 비롯되는 무성의뿐이었다.
반면 전 국민이 다 아는 청춘 멘토 K 교수님의 답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오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편지 잘 읽었습니다.
먼저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세 줄이다. 어차피 이 건도 거절로 끝났지만, 내 편지를 잘 읽어주셨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편지글인가? 긴 글에는 그만큼의 절박하고 어려운 사정이 있는 법이어서, 받은 만큼 분량의 답장이라야 맞겠지만, 못해도 절반은 써줘야 예의라고 생각한다. 논문 심사 후 이름 모를 리뷰어의 뜻 모를 의견에 맞추어 재투고를 할 때면 얼마나 비굴하고 절절하고 간곡하고 타협적으로 답장을 쓰던가.
내가 배웠기로 손편지는 봉투에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을 적고, 또 편지지 첫 줄에 받는 사람을 다시 쓴다. 그리고 우표를 붙여야 했다. 추억의 우표가 생각나 들어가 본 우정사업본부의 블로그에는 “잊혀 가지만 기억해두면 좋은 편지 쓰기 예절”이 역시나 잊히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편지글의 순서는 1. 부르기 2. 시후 3. 문안 4. 자기 안부 5. 용건 6. 작별 인사 7. 날짜/서명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물론 웃자고 쓰는 소리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는 시후, 문안, 자기 안부는 쓸 겨를이 없지만, ‘부르기’,‘작별 인사’, 그리고 ‘서명’ 정도는 써줘야 하지 않을까? 작별 인사는 대개 촉촉한 감정을 전해야 하는데, 정약용 선생은 공부를 게을리하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내 과거의 사람에게’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썼다고 한다.
편지의 기본예절은 이메일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데, 이것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지켜지는 격식이다. 내가 느끼기에 메일의 첫 줄에 편지 받는 사람에 대한 ‘부르기’ (호칭)이 없거나 이상하면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은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나를 깔보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같이 펠로우를 했던 R 선생은 수신자가 많은 이메일에도 ‘선생님께’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읽은 사람 눈에는 본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여 답장의 의무를 북돋는 효과가 있어 좋아 보였다. 간혹 쓰는 회사 내 메일 시스템에는 ‘개개인에게 보내기’라는 메뉴가 있는데, 수신자가 여럿일 때 받는 사람 화면에는 자기에게만 오는 것처럼 구현해주는 팁이다.
편지의 본문을 쓸 때는 주요 용건을 잘 보이게 색깔을 사용한다거나 강조하는 것이 좋다. 길고 장황한 내용일수록 다 읽을 수도 없고, 다 읽는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편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결론과 원하는 바를 본문의 시작 부분에 간단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이 좋다. 핵심적인 내용은 제목에도 들어가 있으면 다음에 다시 찾아볼 때 요긴하다. 요청사항이 많을 때는 숫자를 붙여서 서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그렇게 해야 답장하는 사람이 해당 번호에 맞는 답을 쓰기가 편해진다.
‘참조’와 ‘숨은 참조’ 기능에는 능률적인 메일 쓰기의 묘가 숨어있는데, 이것을 잘 활용하면 ‘참조의 예술’을 펼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참조 수신자는 업무 진행과 답장의 의무가 없다. 참조에 A라는 높은 분을 넣으면, 지정수신자에게는 ‘이 사안은 A 선생님과 사전에 상의한 사안이므로 엄중하게 진행하기 바란다’라는 권위를 부여할 수가 있다. 또 실무적인 일로 메일을 주고받을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셔도 됩니다. 다만 저는 불철주야 일을 하고 있는 점을 똑똑히 잘 기억해 두세요’라는 뜻을 보여줄 수 있다. 상급자가 아닌 사람을 참조로 넣을 때는 ‘이 사안에 대해서 당신의 역할은 아직 모호하지만, 당신 일처럼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조 수신자는 결국 지정수신자로 등극하는 일도 생긴다. ‘숨은 참조’는 ‘네가 해준 일을 내가 한 일처럼 위에 보고하는데, 재능기부 언제나 고맙게 생각한다.’라는 뜻을 담을 수도 있고, ‘내 너를 특별히 어여삐 여기므로 세상이 돌아가는 보여주겠다.’라는 의미도 있어서 속마음을 전할 때 유용한 기능이다.
늘 좋은 말과 좋은 내용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이메일만 받기를 기다린다. 그래도 손편지만큼의 기쁨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