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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Apr 07. 2020

영화 [칠드런 오브 맨]  

"신념의 반대에는 운명이 있다."



칠드런 오브 멘 (Children of Men, 2006)

 

감독: 알폰소 쿠아론

출연: 클라이브 오웬 (Clive Owen), 줄리안 무어 (Julianne Moore), 클레어-홉 애쉬티 (Clare-Hope Ashitey)

 

"신념의 반대에는 운명이 있다."

 

때는 2027년. 다시, 인류는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를 겪고 있다. 테러와 폭동은 일상적이고, 전 세계의 주요 도시의 이쪽저쪽에서 매일 새로운 연기가 불타오른다. 지구를 뒤덮고 있는 끝 모를 재앙 앞에 국가들의 공권력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 재앙의 원인이 친절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2009년부터 시작된 '불임 사태'가 그 근본에 있다고 추측된다. 그즈음 신종 독감이 전 세계에 퍼졌는데, 신생아들은 국경을 가리지 않고 사망했고, 임산부들은 유산을 했다. 그 이후로 지구의 모든 여성은 불임을 겪고 있고, 현재 가장 어린 인간은 18세, 그마저도 최근 어이없는 사고로 죽었다.

 

이 끔찍한 사태의 기전을 설명할 수 없기에 치료제는 없고, 인류는 모두 늙어만 간다. 태어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의 질서가 송두리째 붕괴되고 있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없다는 말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좋은 것을 만들고 지킬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10개의 계단 위에 선 채로 순리대로 순환하던, 인류의 바닥을 받치던 2개의 계단이 사라지면서 순환이 멈췄고, 남은 계단도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상을 선하게 유지시키는 순수의 원동력을 상실했고, 늙어가는 어른들은 더는 내일과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욕망에 충실한 채로 허무와 무질서에 포섭되어 버렸다.

 

유일하게 군대가 유지되는 국가인 영국만이 폭력과 절망으로 지탱되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문명'의 경계는 이민자 봉쇄령 아래에서 물리력으로 겨우 그려진다. 이 경계 안에서는 '한번 복용으로 100% 편하게 죽을 수 있다'고 정부가 보증하는 안락 자살 약물(Quiet Us)이 자연스럽게 팔린다. 세계 각지의 난민들은 이런 나라로 희망을 품고 들어오려고 하지만, 진짜 영국인이 아닌 외지인들은 눈앞에 보이는 안온함의 세상 직전에서 '난민'으로 낙인 찍혀 인권을 유린당한 채 연행되고, 동물을 운반할 때나 쓰일 법한 철제 케이지에 구금되어 이민자 구역으로 추방된다. 트럼프의 반이민자 정책을 10년 전에 예견한 놀라운 설정이다.

 

주인공 테오는 영혼 없는 주정뱅이 공무원이다. 정치에는 관심 없고 돈은 좀 버는 편이다.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고, 남들처럼 희망 없는 삶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혼했던 전부인 줄리안을  만나게 된다. 18년 전 세상을 삼켰던 신종 독감으로 아들 딜런을 잃은 부부는, 이혼하여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줄리안은 이름만으로는 동물 보호단체 같은 피쉬당의 리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피쉬당은 난민들의 권익을 위해서는 폭탄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 극렬 무장 반정부단체였다. 거의 모든 영화 속에서 전 부인을 만나는 '돌아온 남자'들은 그때부터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더욱이 액션 영화라면 죽을 각오까지 필요하다. 잘못된 만남에 대한 속죄가 목숨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몰랐던 테오는 과거의 정에 이끌려 줄리안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줄리안이 집안 좋은 공무원 신분의 전남편에게 꺼낸 부탁은 처음에는 사소하게 보였다.

 

"통행증 하나만 부탁해. 해안으로 보내야 하는 여자애가 있어. "

 

 애초부터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테오가 지인 찬스로 어렵게 발급받은 통행증은 동반 패키지 여행증이었다. 2인 1각의 고난이 예정된 여정.  테오와 동반하게 된 여자는 '키'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흑인 난민이었다. 세상에 신생아가 태어나지 않은 지, 18년 만에 임신에 성공한 기적 같은 여자. 해안으로 보내야 하는 여자애는 양양 해변에 서핑하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 이름이 '키'인 이유는 그녀가 인류를 다시 구원으로 이끄는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약성서의 이야기가 겹친다. 아기 예수와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 하지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커다란 축복을 가지고 있는 이 만삭 임산부는 성모 마리아처럼 고귀한 삶을 살아온 것이 전혀 아니었다.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테오에게 키는 다음과 같이 명랑하게 대답한다.

 

"나도 몰라요. 하도 여러 명이라....."

 

피쉬당에서 볼 때도, 태어날 아기의 아빠는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의 존재는 인류의 구원보다는 정파적 목적으로서 더욱 중요했다. 새로운 기적이 박해받는 난민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영국 정부에서 알게 된다면 아이를 빼앗아서 영국 내 상류층에서 태어난 것으로 왜곡할 것이라고 예단한다. 극렬 피쉬당원들은 키와 태어날 아기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조직 성장의 상징적 도구로 활용하려는 계획으로 원래 줄리안의 계획이었던 '휴먼 프로젝트'로 순순히 보내지 않는다. 이 얽히고 설킨 정치판에서 쫓고 쫓기는 행각을 벌이면서 키와 테오는 생사의 갈림길을 여러 차례 지나, 참으로 비위생적인 조건에서 진통과 출산을 겪게 된다. 시설도 없고, 장비도 없고, 전문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테오에게는 액션 배우 역할이 끝나고, 어느덧 산부인과 의사 역할이 맡겨진다.

 

지금은 상식이 됐지만, 놀랍게도 의사들이 환자를 진료하기 전이나 수술을 하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은 150년 정도 된 일이다. 1847년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이라는 병인론이 수용되기 전, 헝가리인 의사 젬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1865)가 있었다. 그가 비엔나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 많은 임산부들이 패혈증으로 사망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해부학 실습실에서 부검을 마친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고 산부인과 진료를 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의사에게 부검을 한 뒤에는 반드시 염소액에 손을 씻고 산모를 진찰하라는 지시를 했고,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의사들은 자신들이 질병을 퍼트리는 더러운 매개체라는 젬멜바이스의 말에 분개했다고 한다. 2027년의 난장판 속에서도 올곧은 과학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던 테오는 다행스럽게도 젬멜바이스의 후예였다. 테오는 그가 늘 코트 주머니에 소지하고 있던 위스키를 알코올 베이스의 손 소독제로 주저함이 없이 활용한다. 줄리안의 위대한 과업에 주정뱅이 전남편이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손 소독제를 항상 품에 갖고 있는 자. 그녀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에 대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켰던 세례자 요한 수준의 예지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러 등장 인물들 중에서 키, 줄리안, 미리엄, 마리카 등 여성들은 늘 서로를 지지하고 연대하여 희망의 불씨를 안전하게 봉송한다. 태어난 아이도 여자다. 반면 남성들은 정부와 반정부파를 가리지 않고 배신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 이 험한 분쟁이 한 순간 조용해지는 순간이 오는데, 키의 일행들이 출산한 아기 울음소리를 앞세워 해안으로 향할 때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휴먼 프로젝트'라 불리는 새로운 인간 세상으로 가는 배 이름은 '미래호'다. 온갖 역경을 겪은 인류의 희망은 과연 꺼지지 않고 '미래호'에 승선할 수 있을 것인가?

 

"딜런으로 할래요. 아기 이름요. 여자 이름도 되잖아요."

키가 빚을 진 테오에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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