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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Apr 20. 2020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 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운동장 모퉁이가 좋다. 초등학교는 어릴 적 그대로 흙먼지를 간직한 채 시끄럽게도 건재하다. 아이들 노는 소리는 여름날 매미 소리만큼 끈질기고 대책이 없다. 그 모퉁이에 앉아, 살아있어서 소리를 내는 것들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나는 올해로 서른다섯인데, 8월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 별자리는 사자자리이다. 이 별자리를 가진 사람들은 사교성 좋고, 지루한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정확히 내 성격과 반대다. 무리의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지만, 내가 사람들 눈에 뜨이는 것은 싫었다. 술을 잘 못하고, 근육질도 아니고, 고기보다는 순두부가 좋다. 그래도 동년배 가수 김광석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털털한 웃음을 달고 산다. 그는 많은 노래를 남기고, 작년에 갑자기 죽었다고 했다. 텔레비전에 비친 그의 환한 영정사진을 볼 때마다 그의 젊고 밝은 죽음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난 기억을 박제하는 사진사다. 사진관의 이름은 초원사진관. 증명사진, 돌 사진, 사진 확대, 출장 촬영, 비디오 촬영도 한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진관을 물려받았는데, 연로하신 아버지는 이제 돋보기 없이는 일을 잘 못한다. 사진관은 길 모퉁이에 있다. 모퉁이 너머 왼쪽에는 우리슈퍼가 있고, 더 멀리는 태극기 문양의 항공사 광고 간판이 있다. 사진관 앞 도로에는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있는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서 사진관을 그늘로 덮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길을 뒤덮는다. 사진관의 전면에는 통유리가 있다. 나는 그 유리 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용히 보는 것을 즐긴다. 사진관 밖 나와 상관없는 것들을 지켜보는 일은 내 책임이 아니라 마음이 편하다. 사진관 안에는 파란 날개를 가진 오래된 선풍기가 있다. 태엽 감는 괘종시계가 있고, 필름 카메라를 쓴다. 이것들에는 아버지와 나의 손때가 묻어있다. 손님들을 위한 대기 소파 위에는 '숨은 불씨 불행되고, 살핀 불씨 행복된다'는 내무부의 표어가 붙어있다.


사진을 찍으면 꽤나 복잡한 과정을 통해 종이로 인화된다. 손님이 사진의 실물을 확인하는 데는 이틀 정도가 필요하다. 이 시간이 내가 주관식 시험을 치고 결과를 보는 시간이다. 손님들은 출제위원이면서 채점관이다. 몇몇 손님들이 사진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볼멘소리를 하면 거울을 보여줄까 하다가 그냥 다시 찍어준다. 손님의 마음에 들지 못한 사진은 결국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진이다. 내가 찍어온 사진 중에 만족한 사진들은 사진관 앞에 걸어놨다. 가족사진도 있고, 친구들끼리 찍은 사진도 있다. 사진의 주인공들에게 일일이 허락받지는 않았는데, 지금까지 누구 하나 크게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보기에 좋은 사람들을 잘 찍었고, 잘 골라서 내건 사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다. 지원이는 잠시나마 내 세계로 편입됐었던 아름다움 중 하나였다.


사진관의 문 바로 오른쪽, 가장 좋은 자리에는 지원이와 내 여동생이 팔짱 끼고 찍은 사진을 걸어놨다. 둘은 여고 친구다. 내가 아버지에게 사진을 배우고, 처음 연습 삼아 찍어본 사진이었음에도 가장 아끼는 작품이 돼버렸다. 거의 모든 첫사랑이 그렇듯, 지원이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다. 좋지 않은 일로 친정에 들른 듯했다. 안색이 많이 어두워 보였다. 지원이는 어디서 내 소식을 들었는지, 슬픈 눈으로 내 안부를 물었다.

"오빠 아프다는 얘기는 들었어. 많이 심각해?"

"아니야, 나 괜찮아"

이렇게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이제는 사진관에 걸려있는 자신의 사진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내려야 할 추억으로 그친다.

 

올봄부터 어지러움이 생겼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기억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병원 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별 것 아닌 것다고 했고, 좀 쉬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별 것 아닌 것'이란 말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내 증세는 점점 심해져갔다.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고, 뛰면 숨이 찼다. 병원에 다시 가는 길에는 동생이 동행했다. 나보다 일찍 결혼한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착한 여동생이지만, 알고 보면 똑 부러지고 야무진 성격이다. 의사에게 머뭇거리며 말을 잘 못하는 나를 대신해, 동생이 따지듯이 몇 마디를 하자, 의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혈액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예상과 달리 빈혈이 심했다. 그제야 당황한 표정으로 내시경 검사를 해보자고 했고, 일주일 뒤에는 위암인 것 같다는 황당한 말을 했다.처음부터 못 미더웠던 의사 말에 의심이 들어서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니, 배 안과 머리에도 이미 암세포가 퍼졌다고 했다. 나는 배가 아픈 적도 없는데, 위암이라니 그럴 수가 있냐는 질문에, 내 담당의사는 그러니까 암이 무서운 것이라고 답했다. 수술이 가능했을 정도에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굵고 시커먼 내시경 호스를 내 입안에 밀어 넣은 다음, 살을 뜯어내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서 겨우 붙이는 진단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숨은 불씨나 살핀 불씨나 이제 와선 모두 불행의 불씨일 뿐이었다.


앞으로 6개월 정도 남았다고 했다. 현직 사진사가 현생 암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말기 암환자, 시한부 환자. 나는 이런 말이 참 싫었다. 말의 솔직함과 야멸참과 무차별이 싫었다. 소개받은 종양내과 의사는 항암 치료를 해볼 수 있다고 했다. 완치의 희망이 있겠냐는 말에, 몇 달 정도는 더 살 수도 있고, 항암제 부작용으로 더 일찍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아주 드물게는 약물에 치료 반응이 너무 좋아져서 종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완전관해'가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관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그 말의 불친절함 만큼이나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선택을 하라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을 것인지 그냥 이대로 살 것인지를 나더러 선택하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택이라는 말을 쓸 수 있구나. 내 인생의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선택인 것 같아서,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스쿠터를 한 대 샀다. 내 인생을 통틀어, 고민 없이 고른 가장 고가의 물건이었다. 선택이야 이럴 때 하는 것이지, 항암 치료 여부의 결정을 나에게 묻던 그 의사는 책임 회피를 하려던 것 같아 다시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남들처럼 할리 데이비슨을 살 용기는 없었지만, 과감하게 빨간색 스쿠터를 골랐다. 주유소에서 호기롭게 '휘발유 가득이요'라고 말했더니, 겨우 3000원이라고 했다. 기름을 넣어주던 젊은 직원들의 얼굴에서 비웃는 표정이 보였다.앞으로 6개월이면, 이번 크리스마스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계절도 내 인생도 이제 겨우 여름인데, 억울함에 눈물이 났다. 몇 달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 몸안의 암세포와 정상 세포를 잡아 죽인다는 약물이 내 혈관 속으로 돌아다니면서 내 소중한 하루하루를 갉아먹는 것이 싫었다. 주사기로 주입된 항암제가 내 몸에 점령군 행세를 하며 불호령을 내릴 생각에 몸서리치게 무서웠다. 내 영혼을 영혼 없는 것에 내어주는 일은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억지스러운 일 같았다. 대신 남은 한 해, 아니 이번 가을까지라도 하루하루를 천천히 살기로 다짐했다. 막연한 다짐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니 내가 책임을 질 것이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이 선택은 결국 내 몫이었다.


아버지랑 같이 사는 집에는 볕이 잘 드는 마당이 있다. 마루에서 마당을 보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한 시간, 한 나절, 하루, 한 달, 계절 모두 다 다른 빛깔과 다른 냄새의 공기를 낸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늘 변하는 모습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도 천천히 빛이 바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사람의 생이 마당에서 하늘 위로 던진 공의 포물선의 자취라면, 나는 급격한 내리막, 아버지는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비디오 테이프로 영화를 볼 때는, 리모컨 버튼을 순서대로 누르고, 채널 4번을 눌러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 순서를 익히지 못했다. 내가 옆에서 틀어드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아버지의 내리막길과 무능력함에 질려서 그만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날 밤에 죄송한 마음에 리모컨 사용법과 사진관 현상기 작동법을 하나하나 찍어서 화보로 만들어드렸다. 아직 쓸모가 있는 물건들의 사용법을 정리하다가, 문득 나의 죽어 없어질 쓸모에 대해서 생각했다. 리모컨은 배터리만 갈아 끼우면 아버지 곁에서 계속 살 것이므로, 유한한 나보다 훨씬 가치 있고 월등한 존재라는 생각에 질투심이 들었다. 곧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인 나에 대해선 설명을 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피곤한 날, 사진관 문 앞에 어떤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 많은 사진 중에 하필 지원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관심 있게 봐주는 사람들은 늘 반갑다. 다림은 주차단속원이었다. 새침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사진의 확대가 급하다고 했다.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서 불법 주차를 단속하는데, 일은 힘들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젊음에 어울리지 않게 권태스러워 보였다. 그 이후로 매일같이 가져오는 불법 주차 사진들로, 다림은 사진관의 단골이 되었고, 우리는 말이 통하는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롤러코스터와 아이스크림 같은 생기 넘치는 것을 좋아했다.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다림은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복이었다. 여름에게는 너무 일찍 왔고, 나에게는 너무 늦게 왔다. 내 남은 시간에 비해 긴 시간이 필요할 사랑. 비가 오는 밤, 다림을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선 사람은 기다리던 다림이 아니라, 낮에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간 할머니 손님이었다. 낮에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밝은 한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오신 길이었다. 할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림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느새 세상 모든 존재에 다림의 얼굴과 몸이 겹쳐 보인다. 저 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다림이 만큼이나 예뻤겠지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다시 사진을 찍어드렸다. 사진에는 찍히는 사람의 얼굴과 찍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들어간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진짜 다림에게 일방적으로 바람을 맞은 나는, 집에 와서 누워 뒤척거리다가 되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은 그녀가 되려 고마웠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계절은 가을로 바뀌었다.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된 나는 제부의 등에 업혀서 응급실에 실려왔다고 했다. 며칠을 앓다가 깨어난 내게, 동생은 누구 연락할 사람도 없냐며 채근했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살아서 만나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퇴원을 해서 사진관에 돌아왔다. 내게 남은 시간이 거의 다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몸 상태였지만, 정리할 일들이 좀 있었다. 이상하게도 사진관 유리가 돌에 맞은 듯 깨져있었다. 쌓인 우편물 더미에는 봉투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초록색 편지가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림의 편지였다. 왜 소식이 없냐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다음 주에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간다는 말이었다. 짧은 편지였지만 손으로 만지면서 여러 번 읽었다. 그녀의 글씨로 써진 내 이름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읽을수록 편지에는 쓰여있지 않은 말들이 처음부터 숨겨져 있었던 듯 편지지 위에 떠다녔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하얀 편지지와 만년 펜을 꺼냈다. 내 마음의 말들로 짧은 답장을 썼다. 


처음에는 다림의 새 직장에 찾아가 전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페에 앉아서 창 너머로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다림은 다행히 일이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았다. 못 본 사이 무언가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손을 올려 머릿결이라도 만져보고 싶지만, 내 손은 겨우 유리창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웃음의 세계, 나는 슬픔의 세계. 사진관으로 돌아와 그녀가 처음 서있었던 슈퍼 앞의 나무를 한참 봤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전해주지 못한 편지를 상자에 넣어 닫다가 지난번에 내가 찍어준 다림의 사진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내 사진도 하나 찍기로 했다. 아마도 내 영정사진으로 쓰일 것이었다. 옷깃을 여미기도 해보고, 표정을 최대한 밝게 하고,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서 찍었지만 김광석의 마지막 사진보다 어두운 것 같았다. 아마도 김광석의 사진은 죽음을 몰랐던 시절의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고, 초원사진관의 주인은 다시 아버지로 바뀌었다. 다림에게 쓴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내 구구절절함으로 그녀를 슬프게 하기 싫었다. 비통한 상처로 남기보다는, 아련하고 그리운 상대로 남겨지는 것으로 족했다. 지원의 사진이 있던 곳에는 다림의 사진을 걸어뒀다. 밝고 화사한 모습이다. 나는 그녀의 구김 없이 빛나는 모습이 늘 좋았다. 언젠가 그녀가 초원사진관에 들러 자기 사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다림이 나를 기억하며 웃는 동안은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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