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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Oct 16. 2023

타키라고 부르는 타케루라는 친구

중요한 건 여기서 스스로 돈을 벌고, 생활하는 거니까.

나는 그를 타키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날에는 타로라고 불렀다가, 또 다른 날에는 히로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퐁토슈 가의 이웃들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친절하고 싹싹한 데다 프랑스인에게는 없는 융통성이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는 커피를 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주 아담한 카페는 사람들로 붐비는 날이 많았어요. 줄이 길어 미처 커피를 주문하지 못하는 날이면 내가 주로 마시는 커피를 직접 가게로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이런 부분은 프랑스인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찾아볼 수 없는 면이지요.


긴 육아 휴직을 마치고 퐁토슈 가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를 처음 보았습니다. 키가 작고 아담한 체구의 그는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았어요. 프랑스어를 못해 영어로 말을 했는데 악센트를 들으니 일본인 같았습니다. 일본이 답답해서 떠나왔다는 그는 13년째 유럽 곳곳에서 살다가 프랑스에 온 지는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타키는 얼굴만 보면 웃음이 터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별 다른 말 없이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여고생들처럼 웃었어요. 그렇게 아침마다 인사 한마디에 실없이 웃다가 우리는 친해졌습니다.


커피를 사러 간 어느 날, 타키가 내게 어떤 남자를 가리키며 남편이라고 했어요. 부드러운 인상을 한 사람이 나를 보고 웃었죠. 타키가 게이라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결혼까지 한 줄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렇게 멋있는 남자는 대체 어디서 만난 걸까, 어째서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사람은 죄다 게이란 말인가. 타키의 남편은 영국인으로 프리랜서 성악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평소 말할 때 목소리가 그토록 작았던 것일까, 목을 아껴야 해서? 그가 말을 하면 나는 늘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귀를 그의 얼굴에 들이댈 수밖에 없었어요. 저렇게 목소리를 아껴 말하는 남자라면 아무리 잘생겨도 곤란하다 싶었습니다.

한 번은 카페에 타키의 남편과 그의 친구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타키의 남편이 내게 물었습니다. "타키의 원래 직업이 뭔 줄 알아요?" 음악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였다고 하며 다시 음악을 해야만 한다고 그와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지요. 타키는 곤란한 듯 웃으며 나에게 프랑스에 오기 전 한국에서는 뭘 했냐고 물었습니다.


"갤러리에서 일했어.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일을 찾아보려 했는데 잘 안됐어. 그래서 지금은 다 포기하고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지."


"사는 게 그런 거지. 현재 네가 행복하면 된 거 아냐? 중요한 건 여기서 스스로 돈을 벌고, 생활하는 거니까."


"응, 그래서 나는 내가 자랑스러워. 어쨌든 뭐라도 하고 있잖아."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날 이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기껏 공부한 걸 써먹지 못한다는 자괴감과 판매원으로 일하는 내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인 친구들은 가끔 내게 더 나은 일을 알아보라고 조언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변명을 둘러댔지요. 그리고 마음속으론 언젠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날이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로요. 타키는 처음으로 내게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들이 내게는 인생에서 붕 떠버린 것과도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어쩌면 마음속에 늘 이건 내가 아니라고, 언젠가 나를 다시 찾을 거라는 다짐을 품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서 마음에 방을 여러 개 만들어두고 그 안에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고 결국 인생이란 게 어떤 커다란 이데아나 대단한 목적 없이도 단지 먹고 자고 싸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피곤하고 또 바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다들 사는 게 별 거 없다 말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각자 추구하는 소소한 것들 하나씩은 있을 테니 나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쓰고 또 깨어 있자고 생각합니다. 방이 여러 개 있어도 그것들 전부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 그중에 괜찮은 하나만 선택해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게 나에겐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타키가 내게 던진 말 한마디가 마음에 이런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또 시시덕거리며 스몰토크를 나눕니다. 그가 내 이웃이라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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