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문기자협회지<말과 글> 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기고문
작년 이맘때였다. 코로나19로 지칠 대로 지쳐있는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방탄소년단, BTS가 ‘춤추는데 눈치 따위 필요 없다’는 내용을 담은 상큼 발랄한 노래를 발표한 바 있다. 우리말 가사를 고집하던 BTS가 영어 가사로만 이뤄진 <Butter>에 이어 발표한 <Permission to Dance>였다. 노래 가사 중, ‘엘튼 존’의 이름이 들려, 다시금 노랫말을 유심히 듣다보니,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껴지면 그저, 엘튼 존 노래를 따라 불러’ 보란다. 우리로 치면 ‘나훈아 노래 한 자락 구성지게 따라 불러봐’ -나훈아 씨와 엘튼 존이 공교롭게도 1947년 생으로 나이와 경력 등이 비슷하기에 떠올리게 되었다.- 정도로 느낄 수 있을 가사, ‘Just sing along to Elton John’이라니, 영미 문화권에 익숙한 작사가가 참여했겠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에드 시런(Ed Sheeran)이 네 명의 작사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수많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BTS와 작업하고 싶다 나선다더니, ‘에드 시런’이라니’ 싶었던 순간이었다! (이후 콜드 플레이와 협업하는 BTS를 보고 혀를 내두르고 엄지를 힘차게 들어 올렸으며, 필자는 BTS를 또다시 추앙하게 된다.)
당시 가수 민해경 씨의 미국 진출과 퀸시 존스와의 협업을 예상하고 있는 기사였다. 서울 올림픽 이후 “미국 서부에 일고 있는 동양 붐을 타고 마이클 잭슨 가에서 민해경 씨를 발탁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졌고, 이는 “음향기기 회사를 경영하는 한인교포에 의해 처음 연결되었다” 는 설명이 이어지면서 구체적으로 이듬해인 1989년 2월에 “일본 빅타레코드사가 민해경과 마이클 잭슨 가와 합작으로 새 앨범을 출시할 계획”이라는 점도 밝혔다.
그러나 위의 기사대로 이후 민해경씨가 퀸시 존스와 작업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의 단순한 부풀리기 식 언론 플레이였을지, 실제로 추진을 하긴 했으나 끝내 이뤄지지는 못했던 것이었을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서울 올림픽과 같은 국제 행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가수들의 저력이 좁은 한국 시장을 벗어나 더 큰 시장에서 빛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갔음을 느낄 수 있다. 그 ‘가능성’과 ‘실현성’ 사이의 차이가 여러모로 제법 컸을 시기였지만 말이다.
우리 가수들이 외국 팀들과 본격적으로 협업을 시작한 때는 그로부터 10여 년 쯤 지나서다. 해외의 수준 높았던 음향기술을 빌려 완성도 높은 음반 제작을 원했던 가수들의 ‘일방통행’적인 형태의 활동이 아닌, 말 그대로의 직접적인 ‘협업’이 이뤄진 것은 1990년대 말이었다. 첫 상대국은 예상대로 물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이었다. 1998년 경 부터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상황과 맞물려 가요계는 그동안 암암리에- 정확히는 드러내놓고 주고받지 못했던- 주고받았던 일본 대중가요와의 ‘공식적인’ 협업에 이른다. 1999년 일본인 형제 기타리스트와 한국의 리드보컬로 결성되었던 ‘Y2K’와 그 한 해 전인 1998년에 선보인 한일합작 아이돌 걸 그룹, ‘써클’이 그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협업 이전의 ‘섞임’, 또 다른 의미의 ‘협업과정’에 대해 동시간대를 거쳐 온 우리는 너무도 잘 느끼고 있다.
최근 발매된 <한국 팝의 고고학> 저자, 신현준, 최지선, 김학선은,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댄스 음악들에 쓰인 ‘유로 비트’를, “완전한 유럽의 것도 아닌, 그렇다고 그것이 거쳐 온 일본의 것도 아닌, 이른바 ‘문화 번역(cultural translation)’의 산물”로, “복제와 가공을 거치며 또 다른 생산물이 탄생하는 ‘글로벌 순환’의 적합한 예”로 설명한다. .(“유럽에서는 하우스(혹은 디스코), 미국에서는 하이에너지(Hi-NRG)라고 불린 음악”으로 당시 인기 댄스 그룹 ‘R.ef’의 곡들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P.290~292)
그리고 1992년 우리 대중가요사에 불어닥친 ‘혁명’을 이끈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 비슷한 시기 ‘이민파’와 ‘유학파’들의 활동을 언급하며, “복잡하고 이질적인 요인들이 우연하게 (혹은 우연찮게) 만나서 일으킨 물리적 파열과 화학적 작용의 산물”, “지질학적 단층화”라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당시의 ‘섞임’과 눈에 보일 듯 보이지 않았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나름의 치열함이 가득했던 ‘협업과정’에 주목한다.
그로부터 세기가 바뀌고 십 수 년이 흐른 2013년, ‘가왕’ 조용필이 10년 만에 내놓은 그의 19집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조용필은 자신의 색깔에 최신 음악의 흐름을 접목한 10곡을 발표했다. 그 중 대표곡이었던 <Bounce>,<Hello>를 비롯해 대부분의 곡들을 외국 작곡자에게 맡겼다. 이에 대해 한 기사에서는 “국민가수가 외국 작곡가의 곡을 받는다면 그것이 한국의 음악인가”라는 비판이 있다는 점을 전했다. 그러한 비판이 사실이었다면, 조용필 씨를 수식하는 ‘국민 가수’라는 말이 갖는 폐쇄적인 무게감에 방점을 찍은 비판이었으리라 판단한다. 2013년이라는 시점에 나올 법한 비판은 아니었기에 말이다. 당시 우리 가요계는 이미 대형 기획사를 중심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전체를 우리 대중음악 산업 시장으로 보았으며 유럽을 찾아 한국 음악 시장을 소개하고, 다양한 작곡가의 곡을 사기 위해 직접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잘 알고 있는, 당시 ‘보아(Boa)’의 큰 성공에는 일본과 미국, 유럽 시장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함께 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앨범 인세제 등과 관련해 생겨난 또 하나의 거대 음악 시장 관련 매니지먼트 회사들에 대한 얘기는 차치하고, 음악을 소비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현상을 들여다보건대, 대중음악을 비롯한 여러 대중문화계에서의 ‘경계 없음’, ‘국적 없음’은 그 어떠한 분야에서보다 일찌감치 뚜렷했고 꽤 또렷한 결실들을 보여주었다. 통신 기술 등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산물이자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이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의 기사이다. 진통 끝에 영화 시장이 개방되었음에도 한국 영화의 잇단 ‘대박’과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켜진 방송 프로그램 수출의 청신호, 대형 기획사들의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대중 음악계를 조명하며, 대중문화의 빛나는 날갯짓을 예상했었다.
길다면 긴 시간이자 또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른 지금, 현재 대한민국은 반짝거리는 실연자들과 창작자들의 저력, 그 힘을 모을 수 있는 안목과 자본, 무엇보다도 세계 시민의 지지를 통해 대중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혹여 이에 대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재주 부리는 곰’ 등을 운운하며 해외 거대 자본과 플랫폼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곁들여, 우리 성과들에 쏟아지는 찬사를 삐딱하게만 보거나 억지스러운 ‘겸양지덕’을 보이려는 시선들은 과감히 외면하고 싶다. 싸이(Psy)가 10년 전, <강남 스타일>에서 말했듯, 우리는 충분히 “뭘 좀 아는 놈”이기에 말이다.
애드 시런이 함께 한 BTS의 노래를, 자신의 무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팬을 보며, 감사함에 그 눈물을 자신이 직접 핥아주고 싶더라는 과감한 인터뷰를 미국 현지에서 하는 비비(BiBi)의 당찬 모습을, 재미 교포가 쓴 우리 역사를 담은 일본이 배경인 소설을 영상화한 미국 제작사의 드라마를, 일본인 감독이 쓰고 연출해 우리 배우들과 함께 선보인 우리 제작사가 만들어 보급한 영화를, 국적 떼고 마음 열고 충분히 즐기고 누리고 싶다. 나아가 욕심이라도 좀 더 부려본다면, 아니 간절히 기원하건데, 이렇게 같이 섞고 보듬고 다듬어낸 다양한 문화적 산물들을 더 많은 세계 시민들이 그저 평화롭고 건강한 상태에서 골고루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