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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키너 Oct 27. 2019

7장.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음식 양식

미각의 기술사

피렌체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 르네상스 시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고딕 양식을 탈피한 두오모(돔) 양식을 적용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물결

 

르네상스 시기 농업의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평원으로부터 일어났다. 이탈리아 북부는 로마 멸망 이후 그리고 중세기를 이어져왔던 쇠퇴기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중세 말기 흑사병(페스트)의 비극은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온다. 흑사병 이후 인구가 줄어들자 농업인구의 잉여 인력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페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유럽의 축복받은 신세대들은 전통적인 농업기반 경제구조인 중농주의 체제인 봉건제도를 탈출하여 화폐 중심 경제인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북부 이탈리아와 해안을 인접한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이 시작되어 15세기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며, 에스파냐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슬람으로부터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 독립) 운동으로 718년부터 1492년까지의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 회복 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북 중부 지역만이 흑사병 이후 새로운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변영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지친 이슬람으로부터 점점 지중해의 패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은 누리고 있는 제노바, 베네치아 등은 해양을 바탕으로 한 해양 공화국으로 와인과 올리브유 교역에 집중하고 이슬람과 유럽의 중계 무역으로 부가가치를 높여 부를 축적해나가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의 잠시 주춤하고 있던 사이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코무네(comune)라고 불리는 시민 자치 기구를 바탕으로 상인과 수공업자, 하급 영주들까지 도시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유럽의 경제는 다시 농업 자치경제에서 화폐 중심의 새로운 도시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돈이 도시로 몰리고, 상업과 금융사업에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은행과 자본의 이동이 가능해졌다. 북적거리는 시장은 다시 한번 도시의 생활의 중심이 되어 교외의 잉여 생산물을 끌어들이고 산업의 기술혁신을 촉진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르네상스의 발원지로 이야기된다. 피렌체의 패권을 차지하고 예술을 후원한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르네상스 시작은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을 경험한 유럽인들의 세계관의 변화에서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르네상스는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도시가 발달하면서 중세적 교회문화를 부정하고 ‘기독교가 중심이 되는 신앙에서 ‘자본이 신앙이 되는 근대적 자본주의적 문화로의 변화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메디치가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꽂이라는 뜻의 이름의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원지로 불린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화의 부흥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사상은 근대 유럽 문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주인공은 메디치 가였다.  

피렌체에서 조그마한 은행으로 시작한 메디치 가문은 약 350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체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가문이다. 르네상스 운동의 기폭제가 된 메디치 가문은 아낌없는 문예 후원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일으켰다.


메디치가의 성당을 개조하여 만든 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메디치가의 시작은 왕족과 귀족도 아닌 보잘것없는 평민 집안에서 찾을 수 있다. 부흥의 시작은 돈이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가 은행업에 뛰어들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메디치 가문이 탄생한다. 교회와의 정경유착이라는 터널을 통과하여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자 당대 최고의 부를 쌓아 올렸다. 메디치가는 쌓아 올린 부를 학문과 예술 분야에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사익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돈도 잘 사용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생활 전반을 후원함으로써, 그 대가로 예술가들이 마음껏 문화적 끼와 열정을 발휘하여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도시로 꽃 피웠다.      

1429년 조반니 디 비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은행가답게 항상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했다. 자식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철학을 본받으라고 당부했다. 그는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다. 그 요지는 이렇다. “신중하게 너의 의견을 제안해라. 절대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아야 인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송이나 정치적인 논쟁을 피하고 언제나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피렌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교회나 수도원 등 공공건물 건축비용을 기부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당연시하는 문화가 존재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이 재산의 사회환원에 열성적이었다. 메디치의 후예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연구기관인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관하고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서와 인문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착수해 유럽의 사상과 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코시모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져서 가치가 있는 고문서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이렇게 수집된 엄청난 양의 장서들은 모두 유럽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메디치 도서관’에 보관되어 르네상스 시대의 학문적 사상적 기초가 된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등을 후원하며 ‘위대한 자’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로렌초의 집권기에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메디치 가문은 이후 여러 차례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코시모의 열정적인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 덕분에 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고 명문 가문으로 수직 상승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가업이었던 은행업은 1494년에 파산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영주가 돼 피렌체를 통치하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를 포함해 세 명의 교황도 배출한다.

또한 메디치 가문은 혼인을 통해 프랑스 왕실과도 인척관계를 맺었다.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와 마리 데 메디치는 각각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앙리 4세의 왕비가 됐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때때로 굴곡을 겪었지만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인쇄술 발전과 플라티나의 ’ 올바른 쾌락과 건강에 대하여    

 

르네상스 시기의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필사를 통한 값비싼 방법을 써야 했다. 동일한 글씨체로 성서를 만들어 내는 중세의 필사는 상당한 중노동으로 수도원에서는 필사를 구원을 위한 고행의 하나였다. 결국 책은 부자들의 자랑거리와 기독교 전파를 위한 지식과 교회의 성서 정도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인쇄술이 발명되자 책은 양산이 되었고 인류는 지식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500~1400년대까지 유럽에서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 여권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를 바탕으로 철학이나 과학이 문자화 되고 인쇄술은 학문의 '퍼실리테이터(촉매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럽의 알파벳은 기본적으로 20~30개 내외로 음성을 바로 적을 수 있어 인쇄에 적합하다. 하지만 당시의 아시아 지역의 문자는 한자 문화권으로 전체 한자는 수만여 자에 달해서 인쇄를 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 동서양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작용해 문맹의 타파와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미국 유타주 크랜달 인쇄 박물관의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기,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문서 인쇄가 가능하다.


인쇄술은 개신교의 기존 교회의 비판에도 영향을 미쳐 종교개혁의 거대한 바람의 시작이 된다.  마르틴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연설문, 논문, 논 박문은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전 유럽으로 광범위하게 퍼지고 이를 통해 개신교 탄생의 시작이 된다.

물론 순수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플라티나’ 같은 실용서에도 인쇄술의 보급으로 조리학의 발달을 이끌었다.

활자 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여,  구텐베르크는 올리브 오일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한다. 현재도 신문과 언론을 press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올리브 오일 프레스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틴어로 된 최초의 인쇄된 요리 서라고 불리는 ‘요리 기술에 관한 책(Libro de arte coquinara)이 마르티노에 의해 쓰였다. 마르티노는 총대주교와 궁정의 요리사로 일했으며 궁정 요리 사용 실용 지침서였다. 이후, 플라티나라고 알려진 바티칸의 사서가 그 책을 유럽에 소개했다.

플라티나의 ’ 올바른 쾌락과 건강에 대하여’는 1465년에서 1468년 사이에 쓰였는데, 이 책에 실린 요리법 250편 가운데서 240편은 마르티노의 책에서 가져왔다. 플라티나의 올바른 쾌락과 건강에 대하여는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판본들이 발간되면서 유럽 요리의 발전에 중요 변수가 된다. 실용적인 요리서와 건강을 위한 음식물에 대한 호기심, 식사에 대한 철학이 필요한 르네상스 시대의 상류사회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플라티나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단순히 육체적인 필요성을 넘어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윤리 중 7대 죄악 중의 하나였던 음식을 향한 열정인 ’ 탐식‘이었으나 플라티나의 새로운 사상, 즉 ’ 올바른 쾌락‘으로 변환되었다. 기독교 기반의 유럽 세계에 금육과 절제의 식탁은 풍요로운 식탁으로 전환되는 새로운 사고를 불어넣었다. 이제 음식과 식사는 교양 있는 엘리트층이 논할 만한 주제가 되었다. 또한 플라티나는 르네상스에까지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아피치우스의 조리법에 대하여 이런 의견을 덧붙였다.      

“나는 마르티노의 레시피를 좋아하는데, 우리 자신의 취향보다 조상들의 취향(로마시대의 미각적 취향))을 더 선호하는지 묻는다면 딱히 이유는 없다. 설령 모든 기술적인 면에서 우리보다 조상들의 취향이 낫다 하더라도, 맛과 미각적 취향만큼은 우리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도 맛과 미각적 취향에 관한 의지와 욕망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전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기 르네상스의 음식 관련 책들은 새로운 명분으로 유럽인들에게 다가갔다. 음식이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지 잘 이해하면 더 건강한 삶과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다. 이후의 책들의 제목은 건강과 관련 있게 변화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식  


르네상스 시대는 훌륭한 미각과 건강한 식단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전시대의 요리 천재들의 음식에 관한 책을 만들어 문서화하고 보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연회의 세련미는 이탈리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음식은 그 시대의 조각과 예술품들만큼이나 세련되고 정교했다. 오늘날과 같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시각과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고 세련되게 준비되었다. 상류계층은 신선하고 상하기 쉬운 제품을 선호했다. 신선한 식품이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식품보다는 더 바람직하고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맞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도시가 급성장하면서 요리를 하는 직업도 점차 전문화가 되고,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조합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오랜 도제 생활을 필요로 했으나 일단 조합원이 되고 나면 조합이 고용을 보장하고 사고가 나도 적극 지원도 해 주었다.

설탕은 르네상스 요리의 주된 조미료였다. 플라티나는 ’설탕보다 더 향긋하고 맛있는 맛을 내는 것은 없다고 정의했다. 하지만 주요리와 별도로 단 음식인 디저트의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은 플라티나의 ’올바른 쾌락과 건강에 대하여’에 묘사된 르네상스 시대의 식탁을 소개한다.      


이탈리아 주방 Banchetti composition- di Vivendi의 목판화. 1549

르네상스 음식의 특징은 수프였다. 가금류를 정성껏 끓여낸 닭 육수는 매우 풍부하고 비쌌으며, 당시의 조미료가 아닌 향신료의 역할을 하던 설탕과 허브류를 첨가하여 달고 허브 아로마가 듬뿍 들어있는 수프를 즐겼다. 저녁 테이블에서 수프는 여러 종류로 소비되었으며,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수프는 가장 사치스러운 음식 중의 하나였다.  냉장기술이 없는 당시에는 식품을 보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농촌에서 생산된 식품 중 와인과 치즈 같은 것들만 장거리 교역망을 통해 원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플라티나는 이탈리아의 치즈도 좋아했지만 프랑스 치즈를 자주 언급하며 프렌치 치즈는 유럽의 모든 치즈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칭송했다. 르네상스 음식의 중요한 부분은 로스트였으며, 그중 쇠고기 등심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로스트를 준비하는 방식은 현재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차이를 보인다. 먼저 힘줄이 강한 고기를 물에 끓여낸 다음 오븐에서 구웠다. 현대에는 독일의 ‘학센’이 이와 같이 물에 한번 삶고 난 후 조리를 한다. 한번 삶아낸 등심은 오렌지 주스와 장미수(장미향이 나는 물)를 바른 후, 향신료를 뿌리고, 마지막으로 설탕을 등심에 덮을 정도로 뿌린 뒤 오븐에서 구워냈다. 로스트를 먹고 난 후 샐러드를 소개하는 관습은 이미 15세기에 확립되었다. 그러나 현재와는 달리 식탁에 동물의 내장과 간, 뇌와 같은 여러 가지 식재료들과 함께 조리되었고, 샐러드와 함께 생선과 달걀 요리도 함께 제공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와 프랑스 요리의 발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 아버지와 프랑스 공주 사이에 태어나 메디치가의 거대한 재산과 프랑스 지역의 거대한 토지를 물려받은 유일한 상속자였다. 태어난 지 1달도 되지 않아서 부모가 모두 사망하였지만 교황 레오 10세가 작은할아버지이었기 때문에 카트린은 어린 시절부터 금지옥엽이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유럽 왕족과 귀족 사이에 로또 당첨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삼촌인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린 카트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그녀 소유의 프랑스 토지와 작위를 잃게 하고 카트린은 수녀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메디치가의 재산은 아직 그녀의 유산이었으므로 그녀와의 결혼은 아직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효율적인 재산 증식과도 같았다.


The Wedding of Catherine de Medici and Henry, Duke of Orléans

카트린은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프랑스 제2왕자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은행업으로 자수성가한 메디치가의 상속녀와 결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은 평생 오를레앙 공작부인일 것이며, 왕비가 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귀족들을 안심시키고 카트린과 오를레앙 공작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제1왕자 프랑수아가 죽고, 앙리가 왕에 오르며 그녀는 프랑스 왕비가 된다.

카트린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카트린은 앙리 2세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앙리 2세는 카트린과의 관계를 단지 자신의 의무로만 여겼다. 앙리 2세는 카트린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 후작부인이라는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앙리 2세가 마상 시합 도중 죽은 후 왕위를 승계한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섭정하게 되면서 그녀는 프랑스의 진정한 실권자로 떠오른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47년부터 1559년까지 프랑스의 여왕이었고 1559년에서 1589년까지 왕의 어머니이었다. 그녀는 40년 이상 프랑스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프랑스의 요리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트린은 프랑스에 많은 식품 혁신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트러플(송로버섯)과 아티초크, 브로콜리 같은 채소류와 케이크, 마카롱, 크림 퍼프, 커스터드 등 베이커리 제품과 디저트류를 자신의 개인 요리사와 베이커와 파티시에와 함께 프랑스 궁정에 도착했다. 의전에 관해서 당시 포크도 사용하지 않았던 프랑스 궁정에 올바른 식사 예절과 향수를 도입하고 포크와 향수도 모르는 야만족 프랑스에게 이탈리아 문물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이후 부르봉 왕조의 시대에 이르러 유럽의 궁정문화를 주도하게 될 프랑스식 궁정문화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포크의 등장과 에라스무스의 식탁 예절


포크는 아랍문화권에서는 10세기부터 귀족들이 사용하였으나, 이슬람 문화에서 사용되는 포크의 뾰족함은 유럽인들에게는 '신성 모독'적이라 여겨져 금지되어 있던 문화였다.  포크의 역사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유래하지만, 요리 기구로 사용될 뿐 유럽의 식탁에서 사용되는 기구는 아니었다. 포크는 16세기 궁정에서도 매우 귀한 도구였다. 고기를 썰어서 손으로 집어 먹고, 빵 역시 손으로 집어 먹는 유럽인들의 식탁에서는 칼과 스푼이면 충분했다. 귀족들은 백랍이나 스털링 실버(은에 구리를 첨가한 소재)로 만든 식기를 사용하였고,  일반 서민들은 은으로 만든 포크는 값비싼 사치품과 같아 주철로 된 칼과 나무스푼을 사용했다. 일부 군주들은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금으로 된 식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포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나오지만 17세기에 와서야 엘리트 계층의 식탁에서 일상적인 식기가 되었다. 17세기 후반까지도 영국인들은 손가락을 사용했으며, 심지어 유럽 내 최고의 상류 사회인 베르사이유 궁정도 다르지 않았다.    


  

1500년대 후반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포크와 나이프

식탁용 포크와 나이프의 식기류가 도입되면서 식탁을 차리는 개념도 달라졌다.

’플라티나는 계절별로 차림을 달리하고, 식탁에 꽃을 두어 음식과 자연의 향을 함께 차려내는 테이블 세팅의 개념을 제시했다. 꽃이 없는 겨울철에는 실내에 좋은 향수 냄새가 나야 하고, 냅킨과 테이블보도 테이블 세팅에 꼭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상류층은 새로운 식탁 양식은  테이블 매너와 교양 예절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공간으로 발전되어 갔다.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인본주의적 엘리트 계층은 식탁에서의 훌륭한 취향과 사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궁전의 군주들은 여전히 식탁의 위용과 화려한 볼거리를 중요시했다. 공작새는 당시 궁정 요리의 주메뉴로 화려한 장식과 호사스러운 소비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메디치가의 연회에서는 공작 30마리가 테이블에 등장하는 장관을 보여주었다.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신세계에서 칠면조가 들어오면서 유럽의 식탁에는 공작의 자리를 대신한다.

식탁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교의 장으로 발전되었고, 식탁을 어떻게 차리느냐보다는 테이블 매너를 규정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음식과 식사의 세련된 테이블 매너는 사교와 교양 있는 엘리트 계층의 덕목이 되었다.


에라스무스(D. Erasmus, 1466~1536)는 우신예찬과 격언집 등으로 프랑스와 유럽의 16세기의 문화사 상사에 미친 영향은 뚜렷하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남성에게 필요한 유용한 테이블 매너 교육용 안내서 ‘남성에게 필요한 유용한 매너’를 출간해 유럽 전역의 엘리트 계층에게 필요한 적절한 테이블 매너를 설명했다. 이 책은 식탁에서의 초점을 음식 자체보다는 사교에 중점을 두어 친교의 시간과 식탁에서의 지적 대화를 유도했다.  

그의 영향은 전 유럽에 미쳤는데, 에라스무스가 군주의 자제에게 헌정한 아동교육용 예절서인 <소년들의 예절론>(1530)에서 언급한 표정 관리 및 식탁에서의 예절은 16세기 서구의 예절과 매너에서의 까다로움을 엿볼 수 있다. 그중 지금은 당연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당시의 특이한 식탁 예절을 소개한다.


-몸가짐, 몸짓, 옷차림, 얼굴 표정 등의 외적 행동(육체적 예의범절)은 정신적 내면과 인격의 표현이다.

-콧구멍에 콧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손으로 코를 훔쳐서 자기 옷에다 닦는 것은 더욱더 예의가 없다.

-두 손가락으로 코를 풀어 콧물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즉시 발로 비벼 없애버려야 한다.

-이것은 침을 뱉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늑대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이나 대식가들은 식탁에 제대로 앉지도 않고 음식에 손을 댄다.

-음식을 뒤적거리지 말고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먹는다.

-반쯤 먹던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주 무례한 짓이다.

-씹던 빵을 양념 통에 넣어 찍어 먹는 것은 농사꾼이나 하는 짓이고, 씹던 음식을 뱉어 접시에 도로 놓는 것은 품위가 없음을 보여준다.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만약 참을 수 없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해결을 하겠지만 긴박한 상황이라면 기침을 하면서 방귀 소리를 감추도록 한다.      



플랑드르 화파 (Flemish Primitives) : 예술사에서 음식을 그리다.  

   

르네상스 엘리트 사회에서 디너 테이블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요리사의 사회적인 역할도 궁정 사회에서 궁정화가와 건축가들과 같은 다른 숙련 고용인들처럼 전문가이자 가치를 인정받는 전문 직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요리 지식은 노동의 고상한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르네상스 화가들의 성공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근대 이전까지 전문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은 전무했으며 요리 자체도 교양 학문의 지위로 격상하지 못했다. 요리기술은 근대 초기 지식인들의 적합한 연구 대상으로도 간주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식문화를 전해주는 작품들은 요리 저서들보다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화파의 음식에 관한 정물화나 식사 장면들로 규정된다.     

 

Butcher's Stall 1551. oil on panel. by Pieter Aertsen

동물을 도살하고 해체하는 유쾌하지 않은 주방 풍경은 자연의 산물을 인공적으로 변환시키는 힘든 노동이 존재한다. 어둡고 눅눅한 분위기의 주방의 모습들은 르네상스 시대로 오면서 있는 인간의 그대로의 본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예술의 형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르네상스 이전의 서양 회화들은 모두 교회와 신앙의 대상으로 표현되었지만 르네상스 후반 그림은 다양한 사회적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플랑드르 화파(Flemish primitives)는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특히 플랑드르 지역(현대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의 접경지역)의 브뤼헤, 겐트 같은 도시에서 활동한 예술가들과 작품을 의미하는 미술 용어이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으로 발생된 칼뱅교의 종교 원리주의에 의해 성화가 배척되었다. 칼뱅교의 영향으로 이전처럼 교회나 수도원, 군주나 궁정 사회에서 더 이상 그림을 주문할 일이 없어졌다. 시대적 요구에 순응한 성화를 그릴 수 없었던 유능한 예술가들은 부자들과 신흥 부르주아의 풍속화를 그렸고, 정물화를 그려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인간이나 역사가 아닌 꽃과 과일 등의 사소한 사물이 비싼 물감으로 화폭의 주연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플랑드르 화파의 풍속화와 정물화는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풍속화와 정물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플랑드르 화파 화가들은 사냥으로 잡은 새와 토끼, 바닷가재를 주방이나 식품 저장실이나 야외에 놓아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에 담긴 그림들의 요리 재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에 기반에 따라 함께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되는 재료들이 담겨있어 당시의 식사 요소의 유행과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플랑드르 화파의 식사 그림이나 정물화는 오로지 네덜란드의 식단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늘날 서양요리로 대변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음식은 찾아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플랑드르 화파의 음식 정물화들로 르네상스와 근대 이전의 서양요리를 판단하기에 앞서 민족이나 지역적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귀족사회의 음식에 대한 특성이 전 유럽을 대상으로 평준화된 것으로 보아 플랑드르 화파의 그림들은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음식과 식사에 대한 단서를 보여준다.      


파스타, 세몰리나, 듀럼밀     


르네상스 초기의 유명한 소설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는 산처럼 쌓인 파르마산 치즈와 마카로니의 언덕이 존재하는 가상의 나라인 ‘벤고디’를 소개한다.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를 탈출한 열 명의 남녀가 하루 한 개씩 즉 열 개의 이야기가 열흘 동안 이어지는 구조의 이야기다. 표제 "데카 헤메라이(deka hemerai)". 즉, 열흘을 의미한다. 이중 여덟째 날 셋째 이야기에 친구를 놀려주기 위하여 가상의 나라인 ‘벤고디’가 묘사된다. 파마산 치즈의 산과 마카로니 언덕 이외에도 닭 육수로 흐르는 강과 그 육수와 같이 흐르는 라비올리,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화이트 와인이 흐르는 샘 이야기도 나온다. 절구만 찧어도 세몰리나가 나오는 마법의 돌, 지니고 있으면 투명인간이 되는 마법의 돌 이야기로 친구를 골려주는 이야기이다. 르네상스 시절의 파스타와 세몰리나, 마카로니와 라비올리, 파마산 치즈의 산등 당시의 먹거리에 대한 환상과 세속에서 바라는 절대 굶지 않는 사회를 바라는 갈망하는 이야기를 나타낸다. 데카메론의 벤고디는 파스타에 대한 가장 유명한 근대 이전의 묘사이다.

르네상스 시대 음식문화에서 듀럼 밀과 세몰리나로 만든 파스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건조 파스타는 장거리 교역 상품으로 생산되었다. 시실리아는 광대한 듀럼밀 경작지가 있고, 제노바와 나폴리는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하기 때문에 파스타 교역의 중심지였고 최적에 장소였다. 파스타는 '듀럼밀'이라는 밀 품종에서 기인한다. 유럽에서 재배되는 밀에는 Bread Wheat(빵 밀)과 Durum Wheat(듀럼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라틴어로 듀럼(Durum)은  딱딱하다는 뜻으로 글루텐(밀 단백질) 함량이 빵 밀에 비해 월등히 높아 빵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고 호화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런 듀럼밀을 제분을 하면 세몰리나라는 밀가루가 생산되고, 이 세몰리나로 만든 면을 파스타라고 한다.

Decameron에 나오는 10의 주인공을 그린 판본 인쇄 표지. 1492년

빵 밀은 강수량이 많고 서늘한 곳에서 잘 자라지만, 듀럼밀은 강수량이 적고 고온 건조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아랍문화에서 많이 먹는 쿠스쿠스(아랍에서는 쿠스쿠스를 쌀처럼 먹는다)를 만들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14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출간되고, 이 시기에 아시아로부터 국수가 유럽에 소개되었다고 전해진다.

영어권 최초의 요리책이라고 불리는 'The Forme of Cury' (The Method of Cooking을 뜻한다. cury는 중세 프랑스어 cuire :to cook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에서 파스타가 언급되는 걸 보면 유럽에서는 꽤 빨리 파스타가 전파되었다고 보인다.  

건조 파스타는 빵보다 저장성에서 월등한 보존성을 가지고 있어 르네상스 시대 이후 항해하는 모든 배들이 말린 파스타를 싣고 항해를 나섰다.(*Justin Demetri, History of pasta, 2014)      

이후, 17세기에 압출 프레스 형식의 파스타 제조기계가 나오면서 다양한 모양과 질감의 파스타를 대량생산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풍미했던 채식주의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다 빈치는 샐러드, 과일, 채소, 곡물, 버섯, 면을 즐겨먹었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커다란 종이에 시구 형태로 된 르네상스식 건강관리 규칙을 써놓기도 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르네상스 시절 또한 현대의 우리와 식탁 양식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다음 식이요법을 따르라.

식욕 없이 먹지 말며, 가볍게 식사하며, 잘 씹어 먹고, 잘 익혀 먹고 아주 간소하게 먹어라. 식탁을 떠나자마자 서 있고, 점심을 먹은 뒤에 바로 잠들지 마라. 술은 절제할 것이며, 자주 마시되 적게 마시고 식사 외에나 공복에는 절대 마시지 말 것이며 화장실에 가는 것을 늦추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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