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열등감이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나도 몇 군데 붙었는데 여기 온 거야.”
거짓말이었다. 그냥 센척하고 싶었던 거다.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온갖 공채를 지원했다. 다행히 여름 방학 때 S전자 인턴에 합격을 했다. 2달간의 인턴기간 동안 내 안의 그릇된 자존감과 열등감 샴쌍둥이가 자라났다.
‘S 물산은 서울대만, S 화재는 예쁜 애들만 뽑잖아, S 전기는 스펙이 좀 낮고, S 전자는 쪽수가 많으니까 아무나 온대. 그중엔 무선사업부랑 반도체가 나아. 반도체 중에선 디렘이 좋대.’
취업 카페에서 읽고 취준생 친구들과 얘기했던 온갖 찌라시가 모든 계열사를 모아 놓은 인턴 생활 동안 고스란히 정보화되었다. 명랑하고 성실하고 반짝였던 분명 장점도 많았을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우와 좋겠다. S 전자 인턴이라니!
친구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이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지만, 사실 내 안에 순수한 기쁨은 없었다. 분명 기쁨과 안도가 내 안 깊은 곳에 있었겠지만, 이를 발견하진 못한 채, 불평만이 존재했다.
더 좋은 회사의 인턴이 아니잖아. 내가 서울대가 아니고, 자격증이 없어서? 예쁘지 않아서? 머릿속엔 불만족과 자기비하가 가득했다. 나 스스로가 우월해지기도 하고, 동시에 열등해지기도 하는 비교만이 계속되었다. 그 누구도 내게 직접적으로 이런 기준을 준 적은 없다. 그저 내가 아주 공고히 잘 만들어놓은 그 커다란 점수판에서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누구보다 아래에 있고, 누구보다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점수판의 체계는 인턴을 하며 점점 더 고도화되었다.
인턴 합격의 기쁨이 분명 존재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확인했던 건 (정말이다. 이건 마치 자동화된 기기처럼 돌아갔다) 동기들의 학벌, 사는 곳, 부모님의 직업, 그리고 외모였다. 대부분의 학벌이 나보다 좋았고, 많은 아이들이 서울에 살고, 부모님은 하나같이 대기업을 다니거나 전문직 직종자였다.*** 나는 그 안에서 우리 아빠는 사업한다고 말했고, 수능 점수가 훨씬 좋았지만 실수해서 지금 학교를 나왔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치는 선택을 했다. 이것이 거짓은 아니잖아, 부풀렸을 뿐이잖아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겠지만, 지금 봤을 때 말이지… 그건 사실 거짓말이다.
*** 이런, 여러분. 그것 알죠? 이 모든 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기 때문이라는 거요. 물론 그런 양상이 있던 건 확실히 사실 었겠지만, (꽤나 사실임) 나 역시도 내가 보고 싶던 세계만 보고 나의 부족함을 합리화하는데 나름 똑똑한 머리를 굴려왔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인턴을 하고선 다짐을 했을 거다. S 전자에 가지 말아야지. 이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를 가야겠다고. 그게 인턴 동기들을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 스스로가 만든 점수판 속 비교와 열등감을 싹 씻어 낼 수 있는 길은 이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를 들어가면 된다고, 당시의 나는 어떤 확신을 가졌을 거다. 고시 합격을 지위 상승으로 여기듯,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것을 이뤄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열등한 부분은 내 노력으로 상쇄되고, 나는 완전히 업그레이드된 인간이 되리라 여겼다.
이러한 내 마음의 작동원리는 꽤 오래 작용했다.
나의 시선은 내 안이 아닌, 밖으로만 향해있었다. 나의 끊임없는 비교는 어떤 면에서 양적 성장을 가져다 줬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괴롭했다. 꽤나 공고화된 작동원리이다보니 이를 평생 채택하는 삶도 있었겠지만, 막상 내 자신이 평안하냐하면, 절대 그렇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사회적 욕망의 성취감과 소소한 행복감 사이의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했다. 즐겁고도 괴롭고, 행복하면서도 불행하고, 기쁘면서도 슬프고, 충만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시간을 살아냈다. 20대, 30대 초반까지 양가감정이 극대화되었고 그 안에서 자아는 점점 잊혀져갔다.
어찌 됐든 그런 연유로 S 전자보다 더 좋다라고 여겨지는 약 7개의 회사에 지원했고,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경제학 전공을 살려, 수출입은행이나 한국은행 같은 곳을 가면 내가 이기는 건데! 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내 실력 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턴이 취업 보장은 아니기에 당시 공채를 진행했던 은행에 지원했고, 우리 학교 ‘여자' 학생을 선호한다던 한 은행에 붙었다. 내가 무시하던 우리 과 남학생들이 합격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희소성의 원리 같은 것으로, 당시 나는 은행보다 S전자가 더 좋은 회사라고 급을 나누었다.
물론 취업의 형태로는 유명 통신회사에 가는 것만이 내가 ‘이기는’ 길이라 생각했지만, 서류에서 진작 떨어졌다. 당시 인턴하며 친하게 지냈던 SKY 출신 친구의 통신회사 면접 소식을 들었는데, 인턴 중에 ‘다른 회사 못 가는 애들만 S 전자에 가나 봐' 하며, 어떤 우월감과 어떤 불안감을 넘나 들며 인턴 동기들과 몰래 얘기나누기도 했다. 그러니, 최종 합격 후, 신입 연수에서 오랜만에 만난 인턴 동기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도 몇 군데 붙었는데 여기 온 거야.”
나의 열등감이 예의 바른 태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2006년 1월.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대기업이라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겨우 내 나이 24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