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김가지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츤데레 May 08. 2019

<엽기적인 그녀>의 세 가지 포인트

순수, 인연, 그리고 타임머신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서 <엽기적인 그녀>를 보았다. 지금은 없어진 한신코아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면서 말이다. 그때는 전지현이라는 미모의 배우가 지하철에서 토하는 장면에서 빵 터지고, 여대 강의실에서 연주되는 캐논 변주곡에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련하게나마 내가 기억하는 이 영화의 첫인상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생 때 다시 본 영화는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랑을 갈구하는 사춘기 학생이어서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내게 이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부터 틈틈이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서른이 다 된 지금까지 20번도 넘게 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느낀 주요 포인트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가 전공이라면, 나는 개인적으로 박사과정 수료 정도는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단순히 옴니버스식 구성이라던지, 영화의 흐름이 끊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던지 하는 평론가적인 논의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혹자에게는 별거 아닌 동영상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마음속 한편에 따스함을 일깨워주는 영화이기에 서론이 이렇게 길어진 것 같다.



※ 아래의 내용은 약간이 아닌 상당한 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순수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보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소년 같은 남자 주인공과 청순한 여자 주인공이 그려나가는 대학생의 러브스토리라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일단 흔하디 흔한 스킨십 장면이 거의 없다! 가장 임팩트 있는 스킨십이 포옹 정도고, 평소에는 팔짱 정도 끼고 다닌다. 평소에는 그냥 친구처럼 지내지만, 애틋해질 때도 서로의 눈을 촉촉한 따스함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이다. (물론 키스 시도가 미수로 끝난 적은 있다.) 


거의 모두가 기억하는 그 첫 만남


이러한 영화의 관점은 견우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인용해보고 싶다. 상대를 소유하거나 정복해야 하는 목표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존중하는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1) 두 번째 만남 후 모텔에서

그녀의 입술을 보았습니다. 하얀 목도 보입니다. 그리고 가슴도 봤습니다. 전 아기처럼 자고 있는 그녀를 보며 주제넘지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여자의 아픔을 치료해주고 싶다. 

  2) 100일 기념 이벤트를 마치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지금 행복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여관에서 취해 잠을 자고 있던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그녀의 아픔은 이제 치유된 걸까요? 그건 제가 그녀 곁에 더 이상 없어도 된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물론 스킨십이 난무한다고 탁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연애의 거의 모든 부분이 빠르고 찐하게 전개되는 것이 현실이고, 미디어에서도 당연시되는 지금 시점에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부분인 것 같다. 조금씩 상대를 알아가고, 서로 다른 상황에 대해 배려하는 과정들을 말이다.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차분하게 서로를 인정해가려는 과정이 오롯이 보이는 영화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비주얼을 가진 배우들의 스킨십 장면이 없어도 충분히 찬란하다.



2. 인연이라는 주제에 집중해서 보기

영화는 여권 사진을 찍는 견우(차태현 분)가 그녀(전지현 분)와의 만남부터 이별을 차분하게 읊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회상 구간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고, 이야기들은 에피소드식으로 나열된다. 가슴 찡한 이야기도 있고, 대놓고 웃음을 노리는 파트도 있다. 여러 반찬이 잘 어우러진, 한 끼 밥상 같은 영화이다.


좋은 밥상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영양소를 갖추기도 해야겠지만, 하나의 일관성 또한 견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는 견우와 그녀 사이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일관되고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주제의식이라 함은, 운명이다.


나의 우연들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타임머신이 묻혀있는 나무 곁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기도 하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견우의 내레이션으로 읊어지는 말이기도 하다. 노력하는 자가 만들어내는 우연들이 모여서 인연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들이 모여서 관계를 만들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모가 해준다는 소개팅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견우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둘은 만날 수 있었고, 엽기적으로만 생각되는 그녀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우연들이 모이고 모여 마지막 장면에서 그 둘이 손을 잡을 때 코 끝이 찡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3. 타임머신이라는 소재에 집중해서 보기

처음에는 그냥 이스터에그 정도인 줄 알았는데, 계속 곱씹어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견우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해주고는 나무 옆에 있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스크린 좌측 상단에는 UFO처럼 보이는 비행물체가 쓰-윽하고 사라진다. 극 중에서 등장하는 시간 여행, 타임머신의 존재가 화면에 등장하는 최초의 순간이다.


갑자기 사라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는 이유가 있다?!


끊임없이 미래인에 대해 언급하는 그녀, 그리고 이별의 편지에서도 본인은 과거에 메여있는 사람이고 너(견우)는 미래에서 온 사람 같다고 말하는 그녀.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오랫동안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타이르면서도, 새로운 길로 걸어가기에는 죄책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미래에서 온 견우(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이겨낸다. 이렇게 할아버지의 담담한 이야기가 그녀와 견우의 재회에 큰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 속 그녀의 마지막 대사도 견우의 미래를 만난 것 같다는 대사이다. 그러니 타임머신도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추가적으로 많이 다시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은 지하철에서 견우와 그녀가 처음 만날 때, 견우의 미래인 그 할아버지도 그곳에 타고 있다는 점이다. (소-름)




지금도 영화의 몇몇 장면이나 마지막 두 주인공이 손을 잡을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일렁이곤 한다. 어렸을 때는 뭐 저렇게 복잡하게 살아가나 싶었지만, 지금은 인생이라는 여정이 저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조금은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전율이 가득한 그 장면


어려운 고난과 시련, 그리고 수많은 우연을 인연으로 승화시켜야 완성되는 저런 사랑의 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견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런 바람도 가져본다.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고 뭐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꿈꿔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연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니깐.



스틸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을 대하는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