鼓手, the drummer, 1983
* 곧 장국영의 16주기를 맞이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영화 몇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발표된 지 햇수로 5년이 된 <위플래쉬>는 영화의 흥행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계까지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화였다.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감독인 데미언 셔젤은 <위플래쉬> 이후에도 <라라랜드>, <퍼스트맨>등의 작품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춤하지만 주연인 마일즈 텔러도 큰 주목을 받았었다. 그런데 <위플래시>보다 31년 전에 드럼을 매개로 한 청춘 영화가 홍콩에서 개봉된 적이 있었으니 바로 장국영 주연의 <고수>다.
鼓手는 북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다. 우리는 판소리에서 고수를 봐왔기 때문에 ‘고수’라는 타이틀이 한눈에 와 닿지는 않는다. 중국어로 ‘고수’가 ‘drummer’라니 좀 생경한 데다 장국영이 연주하는 드럼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리 이야기하자면 영화 속 장국영의 드럼 연주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런 면이 있었구나 싶어 신선한 발견이었다. 자세히 보면 연기와 드럼 사운드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고수>는 특이하게도 장국영의 외모를 앞세운 로맨스 영화도 아니며 사운드에 공을 들인 음악 영화도 아니다. 당시 그의 필모그래피를 이어온 청춘 영화라고 보는 편이 맞을 텐데 그간의 그의 영화들과는 다른 색다른 면을 접해볼 수가 있다.
완성도는 다르지만 앞서 잠시 언급했던 <위플래쉬>와의 비교는 흥미롭다. <고수>의 토미는 고등학생,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대학생 드러머로 두 명 모두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은 모습을 보인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드럼 생각뿐이며 드럼을 위해 헌신한다. 극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위플래쉬>가 스승과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앤드류의 심리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고수>는 상황 묘사에 치중한다. <고수>의 토미는 앤드류와는 다르게 외부적인 자극 없이 스스로가 본인을 채찍질한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청년아마추어유행단원’의 입단 테스트만 받으면 곧 해소될 내용이다. 일단은 입단 테스트까지 지금처럼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된다. 마음이 착한 토미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계속 이어갈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앤드류처럼 플래쳐에 휘둘리며 끝이 보이지 않는 강박적인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고수>의 토미와 <위플래쉬>의 앤드류 둘은 똑같이 자의든 타이든 드럼 스틱을 놓게 된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마음을 꺾는 것은 한순간이고 미치도록 사랑했던 만큼 미련도 없어 보인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드럼과 초점 없는 둘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연주를 마무리할 것 같았던 둘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도전의 기회를 잡는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우연히 바에서 스승 플래쳐와 마주치며 연주의 기회를 갖는다. 플래쳐의 속삭임은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지만 공허해진 그의 마음을 채울 열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앤드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고수>의 토미는 우여곡절 끝에 악단 입단은 어떻게 되었지만 마음의 동력을 잃어 여전히 드럼에 흥미가 없다. 가족과 여자 친구가 옆에서 힘내어 다시 연주하라고 응원하지만 토미는 심드렁할 뿐이다. 계속되는 성화에 지친 토미는 여자 친구의 마음을 꺾기 위해 예전에 그의 마음을 꺾으려고 스승이 데려간 정신병원에 그녀를 데려간다. 그리고 드럼에 빠져서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토미는 그들을 보고 마음속에 잠든 열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된다. 그리고 다시 불타게 된 열정은 그간에 잠깐 사그라진 마음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더욱 화려하게 불타오른다.
<고수>와 <위플래쉬> 두 영화 모두 결말은 토미와 앤드류의 신들린 듯한 연주로 끝맺는다. 앤드류의 마지막 연주는 이야기의 끝맺음인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인지 플래쳐 교수에 대한 복수인지 그의 한풀이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에, 긴장의 최고조인 순간에 영화는 드라마틱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고수>의 마지막 공연 장면은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긴장이 마무리되는 화합의 장이다. 정신병원에서 영감을 얻은 토미는 1/32박자의 빠른 타악을 보여주는가 하면 연주하면서 노래도 동시에 부르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낸다. 아버지와 스승은 그런 토미의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며 함께 기뻐한다. 이런 관습적인 연출은 감독으로서 ‘가수’ 장국영의 매력을 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수>와 <위플래쉬>는 시대와 장소, 주제의식, 만듦새도 다르지만 드럼이라는 공통분모로 열정 넘치는 에너지를 각자의 개성으로 잘 담아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 ‘드럼’이라는 악기로 청춘의 모습을 풀어내려 한 <고수>의 새로운 시도는 완성도를 떠나 놀랍게 다가온다.
<갈채>, <실업생>, <충격21>에서 장국영과 호흡을 맞췄던 종보라는 <고수>에서도 장국영의 절친으로 단원 모집에 합격하는 색소폰 연주자로 출연한다. 그는 1985년 <천사출변>이라는 영화를 끝으로 7편의 영화 출연을 마친다. 진백강, 장국영과 더불어 청춘스타로 큰 인기를 얻었던 종보라는 1985년부터는 TV진행자로 호평을 받았으나 1989년 30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영몽가락>에 이어 장국영의 여자 친구로 출연한 주수란은 <고수> 이후 다시 원 소속인 TV 드라마의 연기자로 돌아서며 1990년대 초까지 활약을 이어간다. 홍콩의 중국 반환 즈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그녀는 그곳에서 중국어 방송의 진행자로 채식 식당의 사장으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젊은 시절 연예인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며 인기의 뜬구름을 느끼게 된 그녀는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은퇴 이후에도 독실한 신자로 자선 활동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 줄거리 -
토미는 자나 깨나 드럼만 생각하는 청년이다. 아침부터 드럼 연주로 가족들을 깨우고 학교에서도 드럼 생각에 빠져있다. 토미의 아버지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지만 고리타분한 옛날 생각으로 대본이 거부되기 일쑤다. 토미의 아버지는 토미가 지나치게 드럼에 집착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뿐더러 자신의 시나리오 집필에도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드럼을 버리려 한다. 둘은 토미가 '청년아마추어유행악단' 모집에 합격하면 집에서 드럼을 치우겠다는 약속을 한다. 토미는 우연히 영화 촬영 현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전문 드럼 연주자를 알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그에게 배움을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토미의 드럼을 찢어버리고 만다. 낙심하는 토미에게 친구들과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새 드럼을 마련해주고 토미는 더 열심히 연습을 한다. 하지만 기대하던 입단 시험에 낙방하게 되고 그는 다시는 드럼을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드럼 스틱을 다시 잡기 원하는 여자 친구의 청을 거절하기 위해 토미는 여자 친구에게 드럼에 빠져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정신병원에서 토미는 새로운 드럼 타법의 영감을 얻게 된다. 합격자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임이 밝혀져 토미는 악단에 합류하게 되고 공연에서 그는 신명 나게 드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