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의 수단과 방법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얼마 전 아이폰7이 출시됐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출시된 벌써 네 번째 아이폰이다. (마지막으로 만든 아이폰은 5였다.) 처음 아이폰을 만졌던 때와 다르게 그저 하나의 휴대폰으로 생각되어 예약을 위해 새벽부터 기다리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지금 쓰고 있는 아이폰5에 대한 애착인지 스티브 잡스의 유작(?)이기 때문인지 뒤늦게 7을 예약해두고도 선뜻 마음이 옮겨가지 않는다. 이어폰 단자가 없어진 것보다 애플의, 잡스의 고집스러운 디자인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 전기에서 넥스트NeXT 컴퓨터를 만들던 때의 일화를 읽고 있으면 지금의 아이폰은 너무나 애플스럽지가 않다. 바우하우스의 “형태는 기능을 따라간다”와 다르게 “기능은 형태를 따라간다”라고 생각한 잡스의 관점으로는 튀어나온 카메라, 안테나 밴드 등는 기술로 해결이 안돼서 디자인을 포기한 부분일 뿐이다. 넥스트의 컴퓨터도 모든 면의 각도가 90도가 되도록, 각 모서리의 길이는 정확히 30.48센티미터로 완전한 정육면체를 고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형태에 맞춰 회로 기판도 정사각형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컴퓨터 케이스의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않던 완벽주의자였던 스티브 잡스라면 지금 아이폰이 이렇게 나올 리가 없다.
애플에서 쫓겨 나와 넥스트를 만들 때 잡스는 먼저 회사의 로고를 생각했다. IBM, ABC, 웨스팅하우스 등 기업 로고 디자인의 정점에 선 폴 랜드(Paul Rand, 1914-1996)에게 넥스트의 로고 디자인을 맡기기 위해 당시 랜드가 계약돼있던 IBM에 끈질기게 연락해서 허락을 얻어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시안을 요청한 잡스에게 던진 말에서 랜드가 디자인을 대하는 성격을 알 수 있다.
“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고 당신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랍입니다. 내 디자인을 쓰든 안 쓰든, 그건 당신 마음이오. 하지만 나 여러 시안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디자인을 쓰든 안 쓰는,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이러한 말을 듣고도 잡스는 랜드에게 디자인을 맡긴다. 무려 10만 달러에 로고 ‘하나’의 디자인을.
내용 참고: <스티브 잡스> 민음사, 2011
넥스트에 대한 일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폴 랜드의 디자인 생각>을 읽으면서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데 스티브 잡스가 먼저 떠올랐다. 만약 폴 랜드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반대로 디자인계의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하면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혁신적인 사상과 완벽주의자, 그리고 자신의 일에 양보가 없는 두 사람이다.
깐깐하고 고집 센 스티브 잡스를 휘어잡은 그래픽 디자이너 폴 랜드는 20세기 미국을 비롯 현대 그래픽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플랫 인스티튜트와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지만 ‘플랫 인스티튜트 같은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1937년, 23살 나이에 매거진 <에스콰이어>의 아트디렉터, 1938년부터는 <디렉션>의 표지 디자인을 진행했다. 1941년부터 1954년까지 윌리엄와인트라우브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며 진부했던 미국 디자인계에 유럽 모더니즘을 전파했다. 비평가들로부터 “광고 디렉션에 있어 폴 랜드가 이룩한 업적은 마치 세잔이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만큼 크다.”는 평가를 비롯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많은 경의와 칭찬을 받았다.
<폴 랜드의 디자인 생각>은 폴 랜드가 서른셋에 쓴 책이다. 이 책은 그의 작품으로 디자인 이론을 소개하고 디자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서이기도 하지만 단지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디자인 사상을 깊숙이 담고 있는 디자인 철학책이기도 하다. 작품을 훑어보고 가볍게 읽으려고 했는데 지금 것 해온 고민들에 대한 명쾌한 해법이 튀어나와서 책장을 여러 번 되짚어 읽어보게 된다. 몇 개의 글 만으로도 굳어진 감각을 자극하는 통찰력의 깊이는 그 글을 썼던 당시 서른셋의 나이와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책의 말미 '옮긴이의 말’에 나온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고전적으로 들리는 세상”인 현재, 그래픽 디자인은 디지털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UX/UI라는 말이 예전 편집과 그래픽을 말할 때처럼 자주 등장한다. 도제식으로 디자인을 배우는 시대는 아니더라도 그래픽을 깊이 있게 다루는 스튜디오에서 오랫동안 디자인을 익히는 시대도 지내왔지만 이제는 시각디자인(이 말도 오래됐다)과를 나오면 대기업이 우선이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스튜디오를 만들고 독립하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에는 레퍼런스가 (말 그대로)널려있고, 스타일이 좋은 젊은 디자이너도 굉장히 많다. 어쩌면 앞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은 이론을 바탕으로 쌓아 올리는 그래픽 디자인이 아니라 좋은 디자인을 큐레이션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에서는 인공지능이 레퍼런스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폴 랜드의 디자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디자인의 방법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이미 뒤처진 것일 수 있겠지만 디자인의 원칙과 철학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결국 좋은 디자인은 과거에도 좋았고 현재에도 좋으며 미래에도 좋은 디자인일 수밖에 없다.
사족) 부끄럽지만 나 또한 서른세살에 첫 책을 썼다. 안그라픽스에서 출간한 <그래픽디자인, 일러스트레이터>(이기섭, 김욱 공저)는 내가 서른세살이 되던 해에 쓴 책이다. <폴 랜드의 디자인 생각>만큼의 통찰력을 담은 책은 아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도구를 통해 그래픽디자인의 기본을 정리했고 오히려 툴 설명보다 이론 설명에 더 집중했었다. 비록 단순히 도구를 설명하는 매뉴얼로 구입했더라도 책의 이면에 깔린 그래픽디자인의 원리를 찾아내어 읽어준다면 저자로서 더 기쁜일은 없겠다.
10p.
미와 실용성
“그래픽 디자인이 …
의사소통의 수단과 방법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6p.
그가 젊을 때 디자인한 IBM, ABC, 그리고 웨스팅하우스 로고는 이 책의 개정판에 계속 실릴 것이고 미래에도 건재할 것이다. 폴 랜드는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로 활동했으며, 미국그래픽디자인협회 메달을 수상했다. 폴랜드가 세상을 떠난 1996년까지 받은 수많은 경의와 칭찬을 보더라도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디자이너임을 알 수 있다. 서른셋은 책을 집필하기에 젊은 나이일지 모르지만 폴 랜드는 준비된 필자였다. (개정판 서문)
13p.
디자이너의 문제
여러 요소를 재미있게 배열만 하면 ‘좋은 레이아웃’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일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간혹 어떤 시각적 재료를 가지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보다 운 좋게 괜찮은 모양이 생겨나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행착오를 각오한 불확실한 시간 낭비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 구상하고 배열하고 조절하는 데 무심해지고 만다.
38p.
상상과 이미지
진부한 아이디어나 그런 아이디어를 상상력 없이 옮기는 것은, 주제가 빈약해서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어설프게 해서이다. 참신한 시각적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주제만 탓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흔히 나타난다. 1) 디자이너가 평범한 아이디어를 평범한 이미지로 해석할 때 2) 형태와 내용을 결합시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3) 주어진 공간에서 문제를 이차원적 구성으로 해석하지 못했을 때. 이런 경우 디자이너는 자기 눈으로 본 것보다 이미지에서 더 많은 것을 암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그리고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잃는다.
지은이: 폴 랜드 Paul Rand
그래픽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북 디자이너, 어린이 책 작가, 디자인 교육자. 미국으로 이주해온 유태계 2세대로 프랫인스티튜트와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공부했다. 매체 홍보와 잡지 표지 디자인을 시작으로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 패키지, 북 일러스트레이션, 타이포그래피 등 폭넓은 작업을 했으며 IBM, ABC, UPS, NexT 사 등 많은 기업의 로고를 디자인했다. 디자인 교육에도 힘써, 프랫인스티튜트와 쿠퍼유니언, 예일대학교, 일본 다마미술대학교, 필라델피아아트스쿨, 뉴욕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뉴욕아트디렉터스클럽 베스트아트디렉터10상 수상 및 명예의전당 입성, 미국그래픽디자인협회 금상 수상, 영국 왕립예술학회 RDI상 수상, TDC상 수상 등 많은 영예로운 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폴 랜드의 트레이드마크] [폴 랜드: 그래픽 디자인 예술] [디자인, 형태, 그리고 혼돈] [폴 랜드 미학적 경험: 라스코에서 브루클린까지] 등이 있다.
옮긴이: 박효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다.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쌍용그룹 홍보실, 삼성전자 해외본부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고 한양대학교 디자인대학, 삼성디자인학교(SADI), 삼성디자인연구원(IDS)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2016년 현재는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과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 정보인터랙션디자인 전공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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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스북스 금주의 책 2016년 10월 14일 ~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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