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영중 지음, 예담 출판사
톨스토이는 여성혐오론자이면서 예술을 혐오했고 육식을 혐오했으며 검소하고 소박한, 노동하는 삶을 찬양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옹호론자도 아니었으며 자본주의는 더더욱 싫어했다. 죽을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그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수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하고 외로워보이기까지 한다. 자신만의 어떤 가치와 신념을 강요하고 설득시키려 논파하는 것은 폭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게 좋은거지 뭐',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라는 식의 모든걸 인정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몰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 하는 것은 흑백논리지만 어떤 가치를 더 숭고하게 해주기도 한다.
마음 속에서 몇번의 전쟁을 치뤄야 저런 확신과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
- 미생 13화 중
예전의 나는 나와 반하는 의견도 품을 줄 알고 모두를 존중할 줄 알게 되는 사람이 진정으로 그릇이 큰 사람이라 생각했다. 자기 말만 맞다며 고집부리는 사람을 보면 바로 눈살을 찌뿌리기 일수였다. 그러나 어떤 가치에 신념을 갖는 것, 고집을 부릴 줄 아는 그 기세를 갖는 것도 상당한 내공과 학식을 통해 생긴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알맹이 없이 고집만 부리는 기세는 금방 꺾이기 마련이다. 그가 가진 편견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속에 분명히 더 높은 차원의 그만의 신념이 있었기에 톨스토이는 대문호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잔뜩 열이 받은 채로 책 초반 부분을 읽었었는데 그래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을 수 있었음에 다행이다.
톨스토이는 궁극적으로 육식의 중단을 득도의 차원으로 연장시킨다. 육식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수난과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인간이 자기 내부에 있는 최고로 거룩한 정신적 능력, 즉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만을 불필요하게 억눌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살생에 대한 거부감이 뿌리박혀 있는데 고기를 먹기 위해 그것을 억눌러야 하는 것은 지극한 모순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식은 '자연에 거슬리는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인간이 절식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즉 절식의 '첫걸음'은 육식 중단이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한다.
-184p 中
몽골에서 염소의 배를 가르는 모습을 봤다. 잔인한 걸 보는걸 매우 싫어해서 끝까지 안보려 했다. 그때 여행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래도 내가 먹는게 어떻게 해서 먹게 되었는 지는 봐야하는 것 같다는 말에 보러 갔었다. '인간의 내부에 살생에 대한 거부감이 뿌리박혀 있는데 고기를 먹기 위해 그것을 억누른다'는 말이 상당히 와닿았다.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이 고기가 살생을 통해 내 식탁에 올라왔다는 것을 각인하며 먹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몽골에서 염소가 배를 가르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깊이 박히지 않았을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