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0
몽골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나담축제'가 시작됐다. 일주일 내내 시내의 거의 모든 곳이 문을 닫을 정도로 대대적인 규모의 휴일이라, 우리 가족도 굳이 시내에 남아 있고 싶진 않았다. 테를지(Тэрэлж)는 이미 몇 번 가본데다 그 정도는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 평소 갈 수 없는 곳을 물색했다. 와이프는 고비사막을 가보고 싶어 했으나 아이들이 사막을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어디든 물놀이 할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몽골은 워낙 넓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어디든 가면 기본 5~6시간. 가장 만만한 몽골의 중부 아르항가이(Архангай)를 선택했다. 어기 호수(Өгий нуур)에 들려 1박 후 다음 날 몽골제국의 수도인 하르허링(Хархорин)을 거쳐 쳉헤르(Цэнхэр) 온천. 아이들과 딱 좋은 코스라고 생각했으나, 온천에 있는 캠프는 모두 풀 부킹 상황이라고 한다.
오기가 발동했다. 울란바토르에서 무려 800km 떨어진, 몽골의 바다 흡스굴(Хөвсгөл)을 뜬금없이 목적지로 정해 버렸다. 한국에서 절대 운전이 불가능한 거리. 이럴 때 해보지 언제 해보랴. 자동차로 12시간은 족히 걸릴 테니 아이들을 재우면서 가는 게 좋겠다 싶어 밤 9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마트에서 간식거리며 컵라면이며 맥주 등을 구입해 아이스박스에 잘 챙겼다. 타이어 공기도 점검하고, 에어컨 가스도 채워놓고, 길을 잃으면 안 되니 오프라인용 지도도 받고 차에 기름도 가득 채우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새로 도로도 닦았다고 하니 스마트폰만 믿고 일단 출발!
그런데 서쪽으로 2시간쯤 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리다 바양항가이(Баянхангай)라는 북쪽 길로 접어들었을 무렵, 심상치 않았다. 길은 어느 새인가 비포장으로 바뀌어버리었고 밤 12시가 넘어 오프로드를 달리고 있었다. 잘 자고 있던 아이들은 덜컹거림을 견디다 못해 번갈아가며 눈을 떴고, 와이프한테는 호기롭게 '맥주 한 캔 마시고 잠이나 자둬!'라고 큰소리쳤으나 아마 술이라도 마셨으면 토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울퉁불퉁한 길은 계속됐다. 불빛 하나 없는 초원 속에서, 가끔 멀리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보일 뿐, 길을 몇 번이고 돌아나와 오프라인 지도가 알려준 길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오프로드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새벽 2시쯤, 딸아이와 함께 쏟아질 듯한 별과 은하수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도 잠시, 곧 구름이 하늘을 가려 별은 사라지고 말았다. 곧 끝나겠지, 포장도로야 어서 나와라 하는 마음뿐이었다. 한 번은 지도와 다르게 길이 막혀 버려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나 다시 돌아가다 차를 끌고 등산을 하기도 했다. 아마 이때가 가장 힘든 고비였던 것 같다. 그래도 동이 터오니 가야 할 목적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길을 따라 어르헝(Орхон)이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면 포장도로가 시작될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비포장도로는 끝나질 않았다. 그래도 25km 떨어진 볼강(Булган)이란 곳부터는 확실히 포장도로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중간에 시동이 꺼진 유목민의 포터차량을 만났다. 점퍼 케이블이 없는 상황이라, 아저씨의 입고 있던 델 허리띠로 견인을 시도했으나 허리띠는 번번이 끊어지고 말았다. 도와주지 못하고 떠나와야 하는 마음이 안타깝긴 했으나, 딱히 내가 누구 걱정을 할 정신은 아니었다. 집에 잘 가셨겠지. 그런데 그 주변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대마향이 바람에 실려 왔다. 몽골 초원에 널려 있다고 하더니만 사실이었나 보다. 그런데 이거 가축들이 먹을까 안 먹을까.
몽골의 여름엔 5시 반이면 해가 뜬다. 해는 또 어찌나 늦게 지는지 밤 11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곤 한다. 그래서 유목민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중간중간 일하는 유목민들을 만나며 계속 비포장길을 달려 나갔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전 10시경, 초원에 차를 세우고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과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넓디넓은 화장실에 볼 일도 보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더 달려 볼강이란 마을에 도착했다.
볼강은 작은 도시이긴 했지만, 울란바토르 허름한 외곽보다 훨씬 깨끗하고 잘 정돈된 예쁜 시골이었다. 시간 여유만 있었으면 여기저기 들러 사진에 담아 보고 싶었으나 일단 지금은 갈 길이 멀었다.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대략 오프로드 230km를 달리는데 무려 12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출발하고 달린 거리 총 345km, 소요시간 15시간. 아직 절반도 가지 않았는데 완전 삽질 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연히 에르데네트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사실 오프로드 들어서고 2시간 후쯤부터 차를 돌릴까 생각도 했었으나 곧 끝나겠지 하는 마음과 괜한 오기가 발동해 온 가족이 고생하고 말았다. 흡스굴까지 남은 거리 약 450km. 저녁이나 돼야 도착할 것이란 마음에 더욱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그 길은 정말 넋을 잃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도로, 드넓게 펼쳐진 초원, 수많은 양과 말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바뀌는 풀, 나무, 구름의 풍경들. 아마 그 모든 경치를 사진으로 찍기 위해 멈추어 섰더라면 흡스굴까지 2일은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치는 눈과 마음에만 담기로 했다. 몽골의 광활함은 35mm 단렌즈로는 절대 담기지 않는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 200~300 정도 되는 망원렌즈를 꼭 장만하리라!
그렇게 5시간 여를 쉬지 않고 달려 무릉(Мөрөн)을 거쳐 하트갈(Хатгал)에 도착했다. 그리고 20여 킬로의 비포장길을 다시 달려 장하이(жанхай) 해변 쪽으로 향했다. 숙소를 알아보긴 했지만 따로 예약은 하지 않아, 대충 밖에서 봤을 때 사람이 많지 않은 'Nature's Door Camp'에 짐을 풀기로 했다. 도착하자마자 닭고기와 호쇼르로 저녁 식사를 했다. 가족들은 처음 먹어보는 호쇼르를 생각보다 잘 먹었다. 오히려 닭고기 요리가 맛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흩뿌리던 비는 멈추고 해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운 좋게도 쌍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샤워를 하고 잠시 호숫가에서 잠시 바람을 쐰 후 게르로 돌아왔다. 난로에 불을 지피자 게르는 훈훈해졌고 장거리 여행에 지친 우리는 모두 곤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