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재작년 여름부터 1년 동안 일주일에 두 번 테니스 레슨을 받아왔다. 내가 돈을 들여 운동을 배우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학원조차 다녀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팔할은 그와 취미활동을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엄청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테니스는 그가 골프와 더불어 꽤나 오래 해왔던 운동이었다. 나는 골프보다 테니스가 더 재밌어 보였기에 공통의 취미 겸, 건강도 지킬 겸 시작하게 됐었다.
내게 생애 최초로 운동을 가르쳐 준 선생님은 초중생 딸들을 둔 애처가였다. 선생님은 남자친구랑 같이 취미로 하려고 한다는 내 의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레슨하는 틈틈이 딸들 그리고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 레슨 외적인 이야기도 편하게 해주셨다. 시간이 흘러 선생님과의 관계가 조금 더 돈독해지면서 나는 그 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고, 신혼여행으로 테니스 코트가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연습하기 위한 좋은 목표가 생겼다고 반색하시면서 결혼 선물이라며 테니스 가방을 사주셨다. 그러다 나는 정말 갑자기 파혼을 하게 되었고, 레슨을 받으러 가서 결혼 준비가 잘 되어가냐 묻는 선생님께 울먹이며 소식을 전했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다른 이들이 날 위로해주듯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다독여주셨다.
“여기 오면 그 자식 생각은 나는데(특히 레슨 끝나고 땀 뚝뚝 흘리며 공 200개 주울 때 소새끼 말새끼 속으로 엄청 욕한다), 이 취미는 이제 제걸로 만들거에요.”
그런 마음으로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레슨을 계속 했다. 내 테니스 세계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고, 내가 운동 센스도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기에 더 낭비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관둬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열 번 중 한 번 꼴이지만 공을 잘 쳤을 때의 성취감, 심장을 괴롭히고 땀을 쏟아내는 카타르시스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게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동호회에 가입하는 걸 목표로 틀고 레슨을 지속했다. 그러다 갑자기 일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잠시 기약 없이 쉬면서 다시 한 번 이탈을 고민했다. 그렇지만 아직 남은 수강료 분량이 마음에 걸렸고 새로운 걸 시작할 용기는 없었다. 회사에 어느정도 적응을 마치는 동시에 거리두기 지침이 완화되면서 나는 두 달 만에 테니스 레슨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다만 이전 선생님과 계속 할 수 있는 새벽반 스케줄은 도저히 자신이 없어 퇴근 후에 가게 되며 새로운 선생님께 배우게 됐다. 코치는 복불복이라던데 이 선생님이랑 잘 안 맞으면 정말 여기까지만 해야지, 생각했다.
간만에 어색하게 선 코트. 이전이라고 그렇게 잘하던 건 아니었지만 자주 틀리는 자세를 한창 교정하다 뚝 멈춰버려서 그런지 나는 아주 영 감을 잡질 못했다. 그냥 초보에서 왕왕초보로 다시 전락해버린 내 몸뚱아리가 야속했다. 돈과 시간을 그렇게 들였는데, 이렇게 다 까먹나! 절망했지만 새롭고 낯선 선생님은 첫 코치님만큼 쾌활한 분이었다. 마스크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웃음기가 가득했다. 어버버 거리는 내 상태를 파악하면서 도대체 코치님께 어떻게 배운거냐고(내 첫 선생님은 그 테니스 센터 대표셨다), 이렇게 못하는 거 다 이른다고 귀여운 협박을 하셨다.
“저도 그게 문제인건 잘 아는데, 고치다가 두 달을 쉬어버렸어요. 아는데 안 되니까 답답해요.”
취미에 스트레스 받지 말자 생각했지만 지난 일 년을 까먹고 다시 왕초보가 된 스스로가 한심해서 마스크를 끼고 헉헉거리며 우는 소리를 했더니 새 선생님은 웃으면서 여유롭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그렇게 한 번에 바뀌겠어요. 다 시간이 걸려요.”
당연한 말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논리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새 선생님은 이전 선생님이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포인트들을 지적해주셨다. 첫 선생님은 내가 빨리 그와 랠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었다. 공에 대한 감각은 쉽게 늘진 않았지만 발은 제법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라 어떻게든 따라가 쳐내는 건 많이 늘었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타격은 영 어려웠었다. 이번 선생님은 보다 좋은 자세로 운동의 효율성을 높이자 했다. 힘을 적게 들여서 원하는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쳐내자고. 나는 동의했다. 그러나 초보임에도 굳어졌전 익숙한 자세를 바꾸는 건 너무 어려웠다. 내 딴에는 지적받은 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관절은 따로 놀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삐걱거리다 못해 멘붕이 온 내게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네트 너머로 소리쳤다.
“그렇다고 또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어요. 팔을 주욱 왼쪽 어깨까지 넘겨 보내요. 하나하나 다 의식하지 말아요. 당연히 갑자기 되는게 아니니까! 천천히 꾸준히 하면 돼요.”
오늘은 세 번째 레슨을 받고 왔다. 고작 세 번이었지만 쉬고난 후 첫 레슨보다는 확실히 안정을 찾았고 옳은 자세를 인지하고 실행하고자 노력했다. 오늘 레슨을 마치고 그래도 지난 주보다 나아졌냐고 묻는 초보의 초보다운 바람을 담은 질문을 했더니 선생님은 웃으면서, 그러나 결코 과장 없이 ‘어우, 지난 주보다는 나아졌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또 덧붙였다. 천천히 오래 꾸준히 하면 된다고. 나는 내 포핸드와 백핸드도, 내게 남은 너도 그렇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줄어들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앞으로도 나는 테니스를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을 주워 담으며 네 생각을 했어. 하와이의 태양 아래서 네가 사준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너랑 멋지게 랠리하는 상상을 너무 많이 해서 마치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 것 같기도 하거든. 그래, 어떻게 그 긴 시간을 함께 하며 나라는 인간을 채우고, 만들어갔던 너를 완벽히 지워내겠니. 벌써 7개월이 지났지만 함께 한 7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니 네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탓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네 생각만 하는 건 아냐. 소개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네 생각이 나서 울컥하는 대신 세상엔 이런 남자도 있구나,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기쁨을 모를 뻔했다며 아찔해 하기도 해. 정신없이 일과를 보내고 퇴근하면서 비로소 내가 네 생각을 안했었다는 걸 인지하는 날들도 있어. 그래서 내 곁에도 새로운 인연이 있다면 네 생각이 전혀 안 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다만 알다시피 나는 거절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정말 좋아해야만 하니까. 신발 하나 사는 데도 시간 엄청 걸리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사고 헌 신발로 버티는 나인데 사람을 만나려면 당연히 더 많은 날들을 보내야겠지. 하고싶은 말은 나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는 거야. 천천히 오래 꾸준히, 그리고 새롭게. 너를 사랑해서 시작했던 거지만 이젠 나를 사랑하기 위해 계속해야지. 너도 부디 잘 지내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