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hing really matters to me
늦은 밤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나보다 더 어린시절에 이미 그와 친구로 지냈고, 지금도 그와 함께 취미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 그리고 내게는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편한 친구. 같은 그룹의 친구였던 그와 사귀게 되면서,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면서 조금 멀어졌지만 언제 연락해도 어색하진 않았다. 그런 친구지만 갑자기 온 전화에 나는 그의 소식이 들어있을거라 직감했다. 그래서 괜히 딴 소리를 했다.
- 나 테니스 레슨 받는 영상 봤어? 테니스 요즘 너무 재밌다. 나 랠리 좀 해주라!
- 우리 동호회 할 때 와. 근데 거기에 걔도 오긴 한다(웃음).
- 나 진짜 아무런 미련 없고 그냥 걔한테 랠리 연습만 해달라고 연락하고 싶더라. 걘 잘 지낸대?
키득거리면서 한창 테니스 이야기를 하다 먼저 그 애 이름을 꺼낸 내게 친구가 놀라지 말고 들으라고 했다. 나는 선수를 쳤다. 그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가 무얼 어쩌겠는가.
- 왜, 결혼한대?
그러나 돌아오는 답에 나는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아니. 걔 결혼했어.
친구는 그가 결혼식 2주 전에 갑자기 결혼을 알렸다고 했다. 속도위반인가보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친구도 웃음을 흐리며 수긍했다. 이어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 소식 들은 우리 반응도 똑같았다, 정말 황당했으며, 나는 예정된 여행 일정이 있어서 결혼식에 가진 않았다 등등. 그 여자랑 결혼한건가? 내가 전에 너한테 말했던 그 여자. 어디 쪽에서 무슨 일 하는 사람. 친구는 대충 맞는 것 같다며, 만약 그 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그건 더 문제라고 했고 우린 웃음을 터뜨렸다. 꿈 같았다. '이거 꿈이야? 아니네. 뭐라고? 아니 어떻게 그게 그렇게 돼?' 허허 웃으며 말끝마다 짧게 욕을 지껄였다. 너무 말이 안 되니까. 한 시간을 통화했는데 30분 정도 이 문장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의미를 부여할 필요없지만 유독 그 날 아침 회사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 뜬금없지만 내가 어떤 가족에 소속되지 않은 것에, 남편이 없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뻤었다. 그러고나서 나는 문득 그가 주었던 머그잔을 아직도 회사 서랍에 갖고 있는 걸 발견하곤 그걸 버릴지 말지 고민했다. 정말 마침맞게 점심시간에 마음에 쏙 드는 신상 머그를 발견했고, 동생이 그날따라 재고를 적극 알아봐준 덕에 퇴근하면서 바로 구매했고. '내일 출근하면 그 머그는 당장 갖다버려야지' 생각하게 했었다. 그런 일들을 보낸 날, 그 소식이 들려왔다.
워낙 갑작스레 숏 노티스로 알려줬고, 내게 미리 얘기해봤자 디데이 꼽으며 심란하기만 할 것 같아 다들 꽁꽁 숨기고 티도 안냈다고 했다. 그럼에도 내가 우연히 아는 것보다는 자신을 통해 소식을 듣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과 어떻게 말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이제서야 말했다고. 꽤나 속 깊고 현명하네 너희. 배려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임신 소식을 알자마자 번갯불에 콩볶듯 빠르게 준비한것 같다고 했다. 대강의 출산 예정일까지 듣고,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와이프가...'라는 문장에 이게 꿈이 아닌게 맞나, 싶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니 그가 언젠가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별 이유가 없다면 아이도 낳아 살아갈 거란 생각은 했다. 한 다리만 건너면 되니 그 소식이 당연히 들려올 거란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을 줄야. 헛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는 아무 의미 없지만 그가 결혼했다는 날의 정확히 1년 전은, 늦은 상견례를 했던 날이었다. 정말 너는 이별도, 그 후도 상상 이상이구나.
그의 어머니에게 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부족하고, 둘이 서로 맞지 않으니 결혼을 미루라는 말을 직접 듣고 온 폭우가 쏟아졌던 여름날. 신혼집으로 함께 돌아와서 한번도 잠들어 보지 못한 침대에 말 그대로 엎어져서 나는 서러움에 울었다. 그가 고생했다며 토닥여줬지만 어딘가 부족했고, 마음은 불안했다. 그의 얼굴을 보며 눈물젖은 눈으로 악담과도 같은 농담을 했다.
- 너는 나랑 헤어지면 나보다 어린 여자 만나서 혼전임신으로 결혼해서 불행하게 살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잘 살자.
그는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을 하냐며 머쓱하게 웃으며 안아줬지만, 나는 진심도 섞여 있었다. 큰 감정의 동요는 없으나, 이성적이면서도 가끔은 무모하고, 사회가 칭송하는 코스를 밟아온 그를 오랜 시간 지켜보며 그런 상상을 하곤 했었다. 내가 퇴사 후 대학원에 가고 자산 축적과는 멀어진 길을 걸으면서, 그가 대기업 사원이 되고 물질적 가치를 얻는 것이 좀 더 중요해지면서 내가 스스로의 자존감을 조금씩 스스로 갉아먹은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말도 안된다며 웃고, 나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꼭 안아보던 그 여름의 그 장면이 나는 아직도 이렇게 눈에 선한데. 너는 그 소식을 듣고 그 순간이 떠올랐을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니 분명 생각났을거야. 아득하고 아찔했을까.
너털웃음과 욕지꺼리로 장식했던 친구와의 전화를 끊고 나는 흐느껴 울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랑 그렇게 금방 결혼을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고, 날 떠나서 정말 잘 되기를 바란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게 안타까워서 울었다. 그를 잘 아는 또 다른 친구는 그에게 그런 멋진 결말을 바라는 건 나의 자의식 과잉이라고 말했다.
“<라라랜드>같은 결말은 정말 욕심이었나봐.”
내가 과한 감정을 쓰고 있다고 말했던 친구는 라라랜드 얘기를 꺼내자 이해가 된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결혼을 하자고 했지만 점점 확신이 사라졌고, 부모와의 갈등이 생기자마자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아 내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었다. 원가족이나 친구, 동료들과 있을 때는 나를 단 한번도 최우선으로 생각한 적 없었고, 그래서 나를 책임지지 못하고 사람 사이에서 불행해질 게 보여 나를 놔버린 사람이었다. 부모의 반대때문이 아니라, 이십대 중반부터 긴 시간 나와 함께였기에 진정한 자아를 찾아보지 못해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우리가 한 게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행복했던 지난 시간들까지 내 앞에서 잔인하게 죽인 너였다. 그런데도 나는 네 근원적인 불안과 욕망을 내가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너만의 시간을 갖고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데 파혼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전 여자친구의 흔적을 일부러 치우지도 않는 네가 좋다는 사람을 만나, 그 불쌍한 여자가 내 SNS를 그렇게나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았단 것은 그 여자를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누굴 만나든 나와 상관없음에도, 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면, 정말 오롯이 혼자 네가 하고싶은 새로운 일을 하길 바랐기에 남들한테 끌려다니지 말고 제발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서 솔직하게 살라는 말을 남겼고, 그렇게 살겠다고 답변한 너였는데.
얼마 남지 않은 내 대학원 생활을 책임지는 것도 부담스러워 했던 네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니. 사업을 하려던 꿈도 접고, 마음에 안드는 회사 생활도 계속 해야 하겠지. 출퇴근 오래 걸려서 회사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일상을 정말 혐오했던 너였는데 아내 직장때문에 신혼집이 서울에서 먼 곳이라는 소식에도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가 태어나면 주말에도 좋아하는 운동조차 못할텐데. 자신없어했던 새로운 가정 내 역할들에, 아무렴 나보다 수월하다 한들 아내와 원가족 사이에서 힘겨워하겠지.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나를 앞에 두고 당신 아들이 힘드니 전문직 며느리가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던 그의 어머니. 그 여자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내 아버지 장례식에도 왔으면서 나보고 아버지가 안 계시는 것도 아들이 힘들까봐 싫다고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 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계획과 무관하게 아들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까지 말씀하셨던 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자신의 딸을 없는 자식이라고 칭하면서 내게 천륜을 끊는 짓을 감히 할 거냐며 당신 아들의 삶에서 사라지길 종용한 사람이었다.
너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를 아는 친구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습지만 나는 그런 그가 불쌍해서 울었다.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새벽 여섯시에 눈이 절로 떠졌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파혼의 기로에서 가장 고생시켰고, 이번에도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해준 친구에게서 경악의 느낌표가 잔뜩 붙은 답장이 와 있는 걸 확인했다. 아, 그가 이미 결혼했고 아이 아빠가 된다는 건 꿈이 아니었다. 출근해선 하루종일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머그는 버렸다. 심란함에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첫 번째 반응은 언제나 같았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말도 안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통쾌하다고 말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정말 틀린 말이 아니라고. 소식을 전할 사람들에게 전했는데도 멍했다. 퇴근하고 테니스 레슨을 갔다. 그가 사준 라켓과 테니스화를 들고 결혼선물로 받은 테니스 가방을 들고 갔다. 이제 어느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가 될 사람이 준 것들이라 생각하니 정말 모든 걸 처분해야겠다 싶었다. 랠리 연습을 해줄 전 남자친구가 아닌 실존하는 클럽을 추천받았고, 구입할만한 라켓과 그 라켓을 살 곳까지 다 받아왔다. 혹시라도 그가 생각나서 테니스 치다 우는 것 아닌지 걱정했던게 웃길 정도로 아주 숨찬 훈련을 시켜주었고, 레슨이 끝나고 선생님은 그날따라 내게 밖에 나갈 용기를 주었다. 눈물 대신 땀을 줄줄 흘렸고 개운했다.
집에 와서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중고시장에 올릴 라켓 사진을 찍었다. 영정사진 찍는구만. 라켓을 바꾸고 싶다고 들이댔더니 그제서야 댐프너가 잘못 묶여있다며 선생님이 손수 고쳐줬던 게 코미디였다. 나 이 라켓 산 지 2년 됐는데 보낼 때가 되어서야 잘못돼있던걸 깨닫다니. 마침 내 플레이리스트에서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은 방바닥에서 다시금 흐느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소식을 소화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라켓으로 대신 그를 보내는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였고 나는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좀 더 무겁고 나한테 맞는 새 라켓을 만날거야.'
자기 전에는 ATP 테니스 라이브 경기를 보았다. 그와 볼 때는 재미 없었는데. 아는 만큼 보이는 건가, 너무 재밌네. 권순우의 4강 진출이 결정되던 새벽 두 시까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나서야 나는 잠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모든 게 원래 궤도를 찾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갑자기 그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소개팅을 하기로 한 사람과 메시지를 했다. 지난 번 실패로 끝난 소개팅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나누는 인삿말, 대화 하나가 잘 통했고 주책맞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제 그의 소식에 눈물을 흘린 내가 우스웠다. 한 번 만나보지 않은 그와 약속 장소를 잡는데 마음이 설렜다. 그런 내가 웃기면서도 좋았다. 걱정하는 마음에 나에게 연락하는 친구들에게도 정말 이상하지만 벌써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헤어진 후로 마음이 아파 차마 듣지 못했던, 그에게 결혼식에서 축가로 불러달라 졸랐던 노래도 요즘 새로운 마음으로 매일 즐겁게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제 들은 그의 이야기는 정말로 완전한 남의 이야기 같았다. 나와 결혼할 뻔한, 내가 오랫동안 사랑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모르는 사람의 그렇다더라, 같은 이야기. 이상했다. 그렇지만 좋았다. 너의 삶이 더이상 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그러니 혹시라도 내 글을 읽고 있다면 나한테 미안해 하지마. 나는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거야. 너의 행복을 바랐던 내 마음은 여기까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