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PAULE Jul 28. 2021

완벽하게 닫힌 결말

벌써 일 년

어느새  년이 지났다. 아빠와 이별을 준비해야 했던 시절에는 저승사자가 나오는 드라마 <도깨비> 방영중이었는데 요즘 <슬기로운 의사생활> 내게 지난  년을 상기시켰다.   정도 쉽게 간다던 익준이의 대사가 나를 감쌌다. 그러게. 정말  년이 갔다.


예상보다 너무나 빨랐던 그의 결혼 소식은 가끔씩 좋은 시절을 추억하는 나조차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예전 여행 사진을 돌아보며 '좋았었지'하는 내게 그는 지금쯤 태아 보험을 알아보고 있을거라는 친구의 매운맛 농담이 도달하고 나는 이내 그리움을 절로 거둔다. 웃프다는 게 이런건가. 사귀는 그 긴 시간은 영 아니었지만, 이별에는 정말 책임감 있는 인간이었다.


한 달 전쯤, 일 때문에 카카오톡에서 숨김친구를 찾아 들어갔다가 그의 베스트 프렌드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멈추고 말았다. 사진 안에는 분홍색 신랑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가 있었다. 밝게 웃는 그의 뒤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결혼 사진이 걸려있었지만 그의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났다. '그래도 좋나보네.' 그러자마자 코가 시큰거렸다. 신랑 한복 고르러 간 날 한복집 올라가지도 못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엉엉 울며 예약을 취소했던 게 생각났다. 한복 입은 것 보고싶었는데. 잘 어울리네.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눈으로 그의 모습을 보는 건 달랐다.


그러나 저러나 내 삶은 계속되었다. 회사에선 신입 채용 논술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까지 했다. 예전 회사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 지난한 세월을 버텨내니 이런 일도 하게 되는구나, 감개무량했다. 별도로 받은 채점 수고비를 들고 동대문에 달려갔다. 선생님이 추천한 라켓을 사고, 새 가방도 샀다. 새 아이템들을 들고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도 했다. 36도 무더위 속에서도 게임을 했고, 새 사람들을 사귀었다. 가장 열정적이고 충만하게 일과 외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그런 일상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나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소개팅은 물론이고 데이트 비슷한 것도 했다. 그 사람과 석양이 멋진 날 더위를 감수하고 마포대교를 걸으면서 서강대교를 건넜던 스물 다섯 살의 나와 그가 생각났다. 얘를 내가 이렇게 좋아할 수 있었나 싶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여름의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함께 마포대교를 걷던 낯선 사람은 나를 참 예쁘게 바라봐줬다. 정성을 쏟아주었고,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다 해줬다. 멋진 사람이었다. 커다란 보름달이 뜬 적당히 끈적이는 여름밤에 맛있는 와인까지 마셨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꽤나 로맨틱한 하루였대도 주는 게 쉽지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쉽지가 않은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마음을 줄 수가 있었을까, 집에 오는 길에 친구에게 불평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너라고 그게 쉽지는 않았을 거란 걸. 그저 시간이 모든 것을 말이 되게 할 뿐이라는 걸.


어제 꿈에 그가 나왔다. 헤어진 연인이 아니라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그가 웃으면서 안고 있던 갓난아이를 내게 보여줬고 나는 아기를 안아보았다. 네 아이란 말이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잠에서 깨어났다. 완벽하게 닫힌 결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는 정말 남의 이야기일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