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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Nov 29. 2021

아무 것도 아닐 일이었군요

파혼은 더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아

1.

잘 지내고 있다. 회사도 원만하게 잘 다니고 있고, 대학원도 복학해서 여차저차 종강까지 향해가고 있다. 테니스 자체에 푹 빠졌고 그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있다. 고작 운동 하나 할 뿐인데 내 일상은 상당히 달라졌고, 그런 지금이 나는 퍽이나 마음에 든다. 가을에는 내가 예뻐 죽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만났었다. 이성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믿게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 과거를 다 얘기했었다. 그럼에도 내가 좋다니. 오랜만에 믿을만한 안식처를 찾은 것만 같아서 나는 그에게 나의 가장 약한 모습까지 보여줬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마음을 홀랑 내줄 뻔했던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애인 있는 사람을 꾄 나쁜 년의 포지션에 설 뻔했던 게 정말 치욕적이었다. 연인이 있었다는 소식을 타인을 통해 우연히 접한 후,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솔직하게 살라고 조언을 남겼다. 그는 곧바로 사과를 해왔다. 그는 솔직하게 살라는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구구절절 자신의 답답한 심경을 해명했다. 연애를 떠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망이 컸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내가 1년 전에 헤어지는 과정에서 그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사과해. 그리고 솔직하게 좀 살아."


나는 그가 나를 비롯한 타인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솔직하길 바랐다. 괜찮다고 또는 귀찮다고 거짓말로 무마하지 말고 제발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빌리 조엘이 Honesty라는 명곡을 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가사에 대한 나의 공감도는 상위 1%라고 자부한다. '솔직함은 정말 외로운 말' 나는 솔직함 빼면 시첸데 말야.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들의 모든 요구를 안고 갔었더라면, 그래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야 했더라면 얼마나 불행했을지. 아찔하다. 7년을 만나고 결혼식 한 달 전에서야 결혼하면 불행할 것 같다고 혼자 살아보겠다며 이별을 통보한 남자가 1년이 채 되지 않아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소식을 듣고, 겨우 마음을 열었던 남자가 애인이 있는 사람이었던 나의 2021년은 남 보기엔 참 다사다난한데, 그 결혼은 깨진 것이 정말 다행이다.



2.

가까운 친구가 있다. 20대 후반에 동갑내기 친구랑 결혼해서 벌써 결혼 6년차. 아이를 원했지만 쉽지가 않아서 병원도 한참 다녔는데도 바라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상심하며 박사과정이라도 시작해야겠다기에 '그래, 아가가 엄마 공부하라고 늦게 오려나봐'하고 위로했는데 정말로 친구가 박사 코스웍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딱 아가가 태어나게 됐다. 친구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간절했던 아가였는지 알기에 순수하게 축하하는 마음 반, 능력있는 내 친구가 지금 이 악물고 학업과 커리어를 챙기는 것처럼 아이를 낳고 나서도 자신만의 길을 계속해나가길 기원하는 마음 반.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생각났다. 단 한 번 들은 얘기였지만 임신 시기가 얼핏 내 친구와 비슷했고 그래서 출산 예정 시기도 비슷했다. 그에게도 이렇게 배가 커져가는 아내가 있겠구나. 딸일까, 아들일까. 우리는 농담하듯 미래 아이의 태명을 정해놓았고 사귀는 동안 그 이름을 장난스럽게 자주 호명하곤 했는데. 지금 너는 뱃속의 아이를 뭐라고 부를까. 그 이름이 생각날까. 그런 질문을 떠올리곤 혼자 헛웃음을 터뜨린다. 그게 이제 다 무슨 상관이람. 마음 속 깊이 네가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내가 너의 아내가 아니라서, 내 아이의 아빠가 네가 아니라서, 내 아이의 할머니가 네 어머니가 아니라서, 내 아이의 할아버지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싶다.



3.

테니스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남의 결혼식장에서나 우연히 보던 친구를 만나게 됐다. 알고보니 바로 뒷단지에 살고 있기에 가볍게 술자리를 갖게 됐다. 그 애는 멋쩍어하면서 '철이 좀 든 것 같아. 예전의 나를 반성하고 있어'라며 먼저 내가 모르는 졸업 이후의 본인을 소개했다. 나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 지 얘기했다. 비록 10년의 공백이 있지만 이 친구 역시 나의 파혼을 알고 있다. 왜냐면 내 전남자친구와 같은 클럽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만나던 때에도 클럽에 이 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꽤나 반색했었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둘은 소속만 같을 뿐 교류가 깊은 사이는 아니다. 나와 그가 오래 사귄 것도, 결혼 한 달 전에 파토를 낸 도, 그가 갑자기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것도 알지만 자세한 파혼 사유는 전혀 모른다기에 나는 대략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었다. 남에게 오랜만에 꺼내는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둘이 만나서 하는 주제치곤 묵직했지만 어른이 된 친구는 차분하고 부드럽게 호응해가며 들어줬다. '너 결혼 안한 것 진짜 다행이다. 그 가족 진짜 나빴다. 정말 큰일날 뻔 했어.'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듣는 것도 괴로웠는데 이제는 내가 먼저 우스꽝스럽게 몸서리치며 말한다. '진짜 다행이지 으으'. 남자 보는 눈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소개팅을 잘 해주겠다는 친구와 동네 맛집 리스트를 공유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4.

작년  맘때까지 오전에 테니스 레슨을 받으면서 테니스장에서만 교류했던 사람이 있다. 같은 코치님한테 지도를 받았고 비슷한 또래여서 종종 레슨 끝나고 랠리 연습을 하기도 하고, 코치님과 같이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내가 취업을 하면서 레슨 시간을 바꾸게 되니 만날 일이 었다. 몇 달 전, 저녁 시간 레슨장에서 예전 코치님을 만났는데, 코치님은 그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코치님이 호들갑을  바람에 오전 타임 사람들은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것도, 파혼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람도 내게 결혼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가 이내 사과를 했었는데. '나보고 결혼하기 정말 려운 것 같다더니 결국 가긴 가네.'


 여년을 못봤던 사람인데, 내가 레슨 보강을 아침 9시에 받게 되면서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 '코치님한테서 결혼하신다고 들었었는데, 결혼 축하드려요!' 인사했더니 그는 나를 파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결혼식 2 전에 파혼했다고 웃으며 답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시간이 되면 커피나   하쟤서 레슨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파혼 경위를 들었다. 그는 나와는  다른 결로 답이 없는 집안과 엮일 뻔했다. 그는 확신을 가졌던 사람이었는데도 이렇게 됐다며 앞으로 결혼을   있을 , 누군가를 믿을  있을 , 연애를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파혼한    년이 되지 않았다기에 '아직은 한참 힘들 때지만 정말 잘됐어요.  결혼 안한  정말로   거에요'라고 답했다. 그는 혼란스러워보였다. 하지만 지나면 당신도 알게  거에요. 하늘이 구해준 일이었다는 .



5.

실수로 툭 컵걸이를 건드렸는데 통째로 식기 건조대 위로 떨어져버렸다. 비록 혼수로 장만했지만 고심끝에 산지라 계속 써왔던 아끼는 컵 세 개 중 하나가 어처구니 없이 깨져버렸다. 아이, 치우기 귀찮게 깨지고 그래. 혼자서 짜증이 났다.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려고 했지만, 극도의 N이라(MBTI) 파혼의 기억을 더 놓아주라는 신호를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브런치에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이 내 글을 보러 들어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남길 말이 없다. 파혼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는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들이 했던 말도 나를 전혀 괴롭게 하지 않는다. 파혼으로 끝내야 할 정도로 미숙했고 바보같은 구석도 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고 오랜 시간 귀한 사랑을 받았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랑한 덕분에 결혼도 준비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파혼도 했다. 파혼 경험은 아주 특별한 나의 이야깃거리이자 나라는 인간을 성장시킨 멋진 자산이 된 것이다. 그렇게 끝난 것은 정말로 잘 된 일이다.



6.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나쁜 건 경험으로, 좋은 건 추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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