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생일은 어떻게 보내는 것이 최악은 아닐까 고민했다. P형이 생일 전 한잔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가 펑크를 냈고 생일 연례행사인 J와의 술자리는 그와 나의 생일 중간쯤으로 미뤄두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생일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생일날 아무것도 안한 카르마가 쌓여서 내 인생을 알 수 없게끔 바꿔 놓을까봐 걱정이 되어 뭐라도 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 냉장고에는 크루그 샴페인과, 유명한 도멘은 아니지만 샹볼뮤지니 프리미어크뤼도 있다. 캐비넷에는 1973년산 알마냑, 찬장 구석에는 발음은 어렵지만 기분은 좋아지는 그리스산 디저트 와인도 있다. 이것들 중 하나의 봉인을 풀고 악마가 제 역할을 하게 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월요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녹록치 않은 날이었고 다섯시쯤 되자 이미 지쳐버렸다. 오늘도 요가를 갔다가 노곤해진 몸을 끌고 집에서 밥을 먹고, 어디갔는지 모를 시간을 아쉬워하거나 살아보지 않은 삶을 그려보면서 잠에 들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비싼 술은 좀 더 괜찮은 날을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요가는 굉장한 비가 내리는 와중에 이루어졌고, 집에가는 길에도 대단했다. 우산을 써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푹 젖었고 이 상태로 차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엔진오일을 갈아야 하는 때가 한참 지났는데, 푹 젖은 옷으로 운전석에 앉아 기어를 넣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가끔 들르는 맥줏집에 들렀다.
외국인이 주 손님층이고 서빙하는 외국인도 한국어가 서툴러서, ‘국경을 넘지 않고도 국경을 넘는 방법’ - 그 국경 너머가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은 아닐지도 모른다 - 이라는 2000년도 코로나 맥주 선전이 생각나는 곳이지만, 나의 페이보릿 부드바 생맥주를 팔고, 스스로를 격상시키고 싶지만 마땅한 수단이 없을 때 마시는 맥캘란 위스키를 한잔에 만천원에 판다. 이곳에 들러 맥캘란과 부드바를 마시고, 90년대 음악을 듣고, 이 술집에 들어가기 전보다 덜 부자이고 더 타락한 상태로 나섰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평소보다는 기름지고 비싸고 소화가 잘 안되는 식사를 하고, 나머지 하루가 다 가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