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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연 Apr 18. 2018

수연아 나 그냥 집에 갈래.

페루, 와라즈, 3박 4일 산타크루즈 트레킹





산타크루즈 트레킹 1일 차




트레킹 하기 전 날, 와라즈 구석구석을 다니며 나의 또 다른 발이 되어줄 트레킹화를 찾아다녔다. 어깨에 트레킹화를 걸고 다니며 작은 동키 백 두 개도 샀다. 3박 4일 동안 마실 물도 넉넉히 사고 틈틈이 먹을 간식도 샀다.

트레킹 뭐 별거 있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새벽 5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짐들을 보조가방과 동키 백에 넣고 투어사에서 나온 작은 봉고차를 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이 장날인가 보다. 비를 몰고 다니는 우리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다. 트레킹 시작을 알리는 길에 도착했다. 겨울도 아닌 것이 비구름 위에 하얀 눈이 펑펑 내린 듯했다. 지금부터 곧장 8시간을 걸어야 첫 번째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다들 준비해온 우비를 꺼내 입는다. 우비? 우비? 우비??????? 충분할 것 같았던 짐에는 당연히 우비가 없었다. 트레킹 시작되는 길에 작은 슈퍼마켓이 있다. 우비는 없지만 일단 뭐라도 뒤집어써야 될 것 같았다. 파란색 큰 비닐 두장을 샀다. 크게 한 번 접은 뒤 중간을 뻥 뚫어 얼굴을 넣고 양 쪽 모서리 끝을 묶어 팔을 넣었다. 모양이 제법 그럴싸하다.




4시간쯤 걸었을까. 가이드 뒤를 곧장 잘 따라 걷던 우리는 어느새 꼬리가 됐다. 고산지대에서 그냥 걷는 것도 아니고 산을 오른다는 것은 큰 비닐하우스 안에 장시간 갇혀 습기를 다 먹는 답답한 기분이었다. 호흡 조절을 잘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조절할 호흡이 없었다. 100m 달리기를 막 끝낸 듯 들숨 날숨 분간이 안 될 정도록 숨이 찼다. 아무 말 없이 걷던 혜원이가 입을 열었다. "나 내일 집에 갈래. 못하겠어." 무겁게 내 몸을 누르고 있던 고산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우리가 처음 해보는 이 트레킹을 무사히 끝내고 싶었다. 물론 혜원이와 함께.


"혜원아 끝까지 가보면 안 되겠나?"


혜원이는 지금 아무 말도 안 들린다.


"아니, 나는 내일 혼자라도 가야 된다면 그냥 혼자 내려갈래."

"힘들면 내가 니 보조가방 들어줄게. 가보자."

"아니, 너는 끝내고 와. 나는 내일 무조건 갈 거야."

"그럼 베이스캠프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응. 나는 내일 갈 거야."

"우리가 걸어온 만큼 다시 혼자 돌아가야 되는데 니 진짜 혼자 내려갈 수 있겠나? 아 끝까지 해보자."

"내가 알아서 생각할게. 더 이상 말 시키지 마."


대화가 뚝 끊겼다. 10년을 함께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던 우리다. 근데 지금은 꼴도 보기 싫은 저 산보다 우리의 예민함이 더 높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고요한 산속에서 들리는 건 깊은 혜원이의 숨소리와 터벅터벅 힘겹게 한 걸음씩 옮기는 내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가이드한테 내일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자." 적막을 깨는 나의 한마디에 혜원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쉼터에서 쉬고 있는 가이드에게 내일 혹시 혼자 내려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돌아가는 방법은 단 하나. 트레킹을 끝내고 돌아가는 방법뿐이라고 했다. 우스갯소리로 "헬리콥터라도 불러줄까?"라는 말에 혜원이는 절대 농담이 아닌 아주 절실한 "뽀르퐈보르"를 연거푸 말했다. 그리곤 중간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혜원이의 목적은 숙소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베이스캠프까지 도착을 하는 것이 됐다. 더 이상 집에 가고 싶다는 둥 힘들다는 둥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걷는 행위도 여행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단념한 듯했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진지한 상황을 즐기는 편인데 힘들어 죽겠다는 혜원이의 모습을 계속해서 찍었다. 사실은 카메라를 꺼내 찍을 힘도 없던 나지만, 사진 찍히는 걸 피할 수도 없었던 혜원이었다. 새로 오픈한 가게 앞에 흐물흐물 날리는 바람 인형이 떠 올랐다. 분명 걷고는 있는데 땅 속에 다리가 파 묻힌 듯 몸만 흐물흐물 거리는 여자 두 명의 본새가 딱 그러했다. 카메라를 들고 흐물흐물 사진을 찍는다. 짜증 난 목소리로 찍지 말라는 여자도 흐물흐물 피해 보지만 이 상황이 너무 웃기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시선으로, 같은 걸음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베이스캠프



저 멀리 아주 저 멀리에서 '나 베이스캠프예요'라고 손짓하는 텐트 모서리가 보인다. 선두로 가고 있던 유럽 친구들은 이미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 멱살을 쥐고 있는 힘 껏 달리고 싶지만 현실은 길에서 주운 작대기에 무게 중심을 실어 기어가는 듯 걸었다. 걸음과 걸음 사이가 이렇게 느리고 또 일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도착한 첫 번째 베이스캠프. 텐트를 치다 말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땅이 젖고 물이 고여 텐트를 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비를 맞으며 걷고 저녁이 되면서 몸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축축이 젖은 몸뚱이를 막사 안에 구겨 넣었다. 30분을 넘게 벌벌 떨었다. 굵었던 비가 미스트가 될 무렵 다시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나눠주는 매트와 침낭. 침낭은 손으로 꽈배기를 틀면 물이 주르륵 흐를 정도였다. 텐트 안에서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우리가 가져온 침낭에 가이드가 나눠 준 침낭을 또 덮었다. 작은 텐트 안에 혜원이와 나,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친구와 함께 잤다. 평지가 아닌지라 누워서 조금만 꿈틀거리면 오른쪽에 누워 있는 캐나다 친구에게 엉겨 붙는다. 꼼지락거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와중에 왼쪽 엄지발가락이 자꾸 신경 쓰인다. 양말을 벗겨 발바닥을 보고 싶었지만 물집이라도 생긴걸 내가 본다면? 나는 내일 엄살을 피우며 걷지 않을 것이다. 는 무슨.. 끝내 양말을 벗겨내 본다. 500원짜리 만한 크기에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엄지발가락을 휴지로 한 바퀴 감싸고 양말을 다시 신었다. 다 봤으면서 '나는 못 본 거다. 못 본 거야'라는 믿어 의심해보는 최면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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