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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Aug 15. 2021

눈의 여왕과 빛의 여왕

안데르센 명작 '눈의 여왕' 다시 쓰기

1. 스노우의 탄생


신이 세상을 만들고 칠일째 되는 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신은 세상을 만드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썼기 때문에 낮잠을 자고 싶었다. 사실 신은 낮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 때때로 그 전지전능한 힘 때문에 모든 것이 따분했다. 낮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것도 신에게는 무료함을 달래줄 단순한 변덕에 불과했다.  


신은 아담을 진흙으로 빗고 그의 갈빗대에서 이브를 창조하는 순간부터, 아니 아담을 진흙으로 빗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은 세상의 곳곳에 틈을 남겨 두었다. 선인들만 있는 세상을 만들기보다 선인과 악인이 함께 있는 세상, 혹은 인간 스스로가 선과 악을 선택하도록 여지를 남기고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는 편이 신에게도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신은 세상의 '처음(시작)'과 '끝(종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의 고리들은 인간들이 스스로 채워갈 수 있도록 일부로 비워두었다.  


낮잠에 들기 전 신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아주 아주 약간만 나누어서 두 명의 여왕을 창조했다. 한 명은 '빛의 여왕'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눈의 여왕'이었다. 신은 빛의 여왕과 눈의 여왕에게 각각 '봄의 정원'과 '겨울의 정원'을 선사했다. 그리고 두 정원을 가로지르는 선 한가운데에 수십억 년의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을 투명한 얼음 기둥을 세웠다. 그 얼음 기둥은 마치 거울처럼 투명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었다.


신은 마지막으로 봄의 정원과 겨울의 정원에 있는 흙을 반반씩 섞어서 손이 가위로 된 한 소년을 창조했다. 신은 그를 스노우라고 불렀다. 스노우의 임무는 얼음 기둥에 그의 가위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스노우가 얼음 기둥에 그림을 그릴 때마다 조각난 기둥의 파편들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가 겨울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 떨어지는 파편들을 지상의 사람들은 '눈'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그가 봄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 떨어지는 파편들을 지상의 사람들은 '비'라고 불렀다.


과묵한 신은 그전까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스노우를 창조하고 나서는 그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건넸다.


"스노우야, 너는 언젠가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스노우는 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빛의 여왕과 눈의 여왕은 자신들에게는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신이 스노우에게만 귀엣말을 건네자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는 신은 낮잠을 자기 위해 사라져 버렸다. 빛의 여왕과 눈의 여왕에게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로 였다.


2. 빛의 여왕과 눈의 여왕


"빛의 여왕님, 안녕하세요."


스노우가 빛의 여왕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스노우야. 오늘도 변함없이 부지런하구나. 오늘은 무얼 그리고 있니?"


빛의 여왕은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스노우에게 물었다.


"장미를 그리고 있어요."


스노우는 열 손가락의 가위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대답했다.


"내가 가까이에서 그 그림을 봐도 괜찮을까? 방해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물론이지요."


빛의 여왕은 얼음 기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투명하게 보였던 얼음 기둥은 빛의 여왕이 가까이 다가가자 거울처럼 빛의 여왕의 얼굴을 비췄다. 빛의 여왕이 기둥 더 가까이 다가가자 기둥의 한 면에 투명하게 새겨진 장미 꽃밭이 펼쳐졌다.


"와, 내가 봤던 그 어떤 장미보다 아름답구나. 투명하게 빛나는 장미라니."


빛의 여왕의 칭찬에 스노우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쑥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제가 그린 장미에는 색깔이 없는 걸요. 제가 그린 장미도 지상에 있는 장미들처럼 붉은빛을 아름답게 뽐내면 좋을 텐데..."


"아니란다, 스노우야. 네가 그린 장미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풀과 장미가 자랄 수 있는 거란다."


실제로 스노우가 그림을 그리면서 깎아 내는 얼음의 조각들로 인해 지상에서는 풀과 장미가 자랄 수 있었다. 스노우가 깎아 낸 얼음 조각은 지상으로 떨어지며 비가 되어 대지를 적셨다.


"스노우야, 잠깐 그림을 멈추고 저 아래를 내려다 보거라."


스노우가 봄의 정원의 끝으로 가 지상을 내려다보자 비에 젖은 대지가 점점 푸르게 변했다. 그리고 푸른 대지 위로 잎을 피운 장미들이 붉은 꽃망울을 드러냈다.


"와 정말 아름다워요."


스노우가 말했다.


"그래, 저 아름다운 장미도 스노우가 없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것은 사실 눈으로는 볼 수 없단다."


빛의 여왕은 스노우의 한쪽 볼에 입맞춤을 해줬다. 스노우는 예상하지 못한 빛의 여왕의 입맞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스노우는 그 이전까지 자신에게 심장이 있는지 조차 몰랐었다. 빛의 여왕의 입맞춤을 받고 스노우는 그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 같았다.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스노우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음 기둥으로 걸어갔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빛의 여왕이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저 아름다운 장미도 내가 없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것은 사실 눈으로는 볼 수 없어."


스노우는 봄의 정원을 등지고 얼음 기둥 앞에 섰다. 얼음 기둥에 비친 상처 투성이의 얼굴이 보였다. 가위손에 몇 번이고 찢어졌다가 상처가 생기고 아물어버린 자신의 얼굴이 정말이지 싫었다. 이런 흉측한 얼굴에도 빛의 여왕은 기꺼이 입맞춤을 해주었다. 스노우는 얼음 기둥 위에 그린 장미의 정원 한가운데에 빛의 여왕을 몰래 그려 넣었다. 이제 얼음 기둥의 한 면을 다 채우고 다음 면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1년 뒤에 다시 돌아와 새 그림을 그릴 때까지는 그 그림 역시 그대로 있을 터였다. 스노우는 1년이 지나기 전에 빛의 여왕이 다시 한번 자신의 그림을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아 빛의 여왕이 그 그림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사각기둥 모양의 얼음 기둥은 한쪽 면의 길이가 2m에 달했다. 스노우가 좌우로 팔을 길게 뻗으면 그의 가위손 끝이 기둥의 끝과 끝에 딱 걸쳐지는 길이였다.  스노우는 한 계절에 얼음 기둥의 한 면에 그림을 새겼다. 동쪽에 있는 얼음 기둥의 면은 봄의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동쪽 면에 그림을 다 그리면 스노우는 남쪽 면의 얼음 기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쪽 면의 얼음 기둥 오른편은 봄의 정원에, 왼편은 겨울 정원에 걸쳐져 있었다. 스노우는 남쪽 면 뒤로 펼쳐진 정원을 임의로 '여름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남쪽 면의 그림을 다 그리고 스노우는 북쪽 면에 그림을 그렸다. 북쪽 면 역시 정가운데를 기점으로 봄의 정원과 겨울 정원에 반반씩 걸쳐져 있었다. 스노우는 북쪽 면 뒤로 펼쳐진 정원을 '가을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스노우가 여름의 정원과 가을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언제나 그의 시선이 빛의 여왕이 있는 봄의 정원으로 향했다. 스노우의 얼굴에 있는 많은 상처는 여름 정원과 가을 정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 생긴 것이었다. 빛의 여왕에게 시선을 두다 그만 가위손이 얼음 기둥을 빛나가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만 것이다. 가을의 정원에서 그림을 완성한 스노우는 마지막으로 눈의 여왕이 있는 겨울 정원의 얼음 기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의 여왕님, 안녕하세요."


눈의 여왕은 언제나처럼 스노우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스노우 역시 인사를 건네며 눈의 여왕이 답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면 언제나 반갑게 받아주는 빛의 여왕과 달리 눈의 여왕은 차갑기만 했다. 겨울 정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시간이 한없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스노우는 어서 빨리 그림을 완성하고 빛의 여왕이 있는 봄의 정원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의 여왕님, 안녕하세요."


스노우가 인사를 했지만 오늘도 눈의 여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스노우는 어쩌면 오늘은 눈의 여왕이 인사를 받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난밤 스노우가 꿨던 이상한 꿈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스노우는 여느 때처럼 그림을 그리다 잠에 빠져들었는데 왼쪽 볼을 스치는 서늘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잠결이었지만 눈을 떠 보니 자신의 왼쪽 볼에 입맞춤을 하고 눈의 여왕이 눈발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스노우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볼을 비비다 잠에서 깼다. 꿈이었지만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스노우는 인사를 받지 않는 눈의 여왕을 보고 역시나 지난 밤 꿈이 절대로 현실 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눈의 여왕님, 안녕하세요."


겨울 정원에서 그림을 그린 지 이제 곧 3개월이 되어간다. 이틀만 더 그리면 스노우는 봄의 정원에서 빛의 여왕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스노우는 빛의 여왕을 생각하며 얼음 기둥의 서쪽면에 빛의 여왕을 화려하게 그려 넣었다. 하지만 그 그림이 불러올 불행한 결말을 스노우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음날 스노우가 그린 빛의 여왕의 그림을 본 눈의 여왕은 분노에 사로잡혔다. 미천한 스노우가 감히 빛의 여왕을 넘보고 있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스노우를 꾸짖었다. 지상에서는 폭설과 광풍이 불어서 눈사태가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눈의 여왕의 분노에 낮잠을 자고 있던 신도 잠에서 깨어났다. 신은 눈의 여왕에게 무슨 일인지를 묻고 사태를 파악했다. 스노우가 빛의 여왕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흥미로웠지만 흙으로 빚은 스노우가 자신의 힘을 받은 여왕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을 한 뒤 신은 스노우와 빛의 여왕을 지상으로 추방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의 낮잠을 깨운 눈의 여왕에게는 고자질한 벌로 스노우의 가위손을 빼앗아 얼음 기둥에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눈의 여왕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신께 대들 수는 없었다. 빛의 여왕은 아무 말 없이 신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3. 웃지 않는 사람들


눈의 여왕은 스노우를 대신해 얼음 기둥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스노우를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화가 나서 그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눈의 여왕의 분노는 얼음 기둥에도 스며들었다.


스노우가 있던 시절 사람들은 첫눈이 오는 날에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오래된 연인에게 카드를 보내기도 하는 등 추억에 잠겼다. 어린이들은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고드름을 따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여 먹기도 했다.


하지만 눈의 여왕의 분노가 깃든 눈발로 즐거웠던 첫눈의 추억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새하얗던 눈은 눈의 여왕의 분노가 깃들면서 회색으로 변했다. 눈의 여왕의 나쁜 기운이 들어간 회색 눈으로 인해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렸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피를 토할 때까지 기침을 하거나, 고열로 인해 땀으로 온몸이 흥건히 젖었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었고, 머리가 멍해서 기억력이 나빠지는 사람도 생겼다. 사람들은 회색 눈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겨울에만 마스크를 쓰던 사람들은 한 여름에도 마스크를 써야 했다. 회색 눈으로 인한 지독한 감기라고 생각했던 질병은 봄과 가을, 심지어는 여름에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마스크를 쓰고 코와 입을 가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거리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이제 서로가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로 말을 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굳어져 갔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미소를 나누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만 갔다. 굳어 버린 표정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4. 아이와 젤다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곳 중 하나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사는 고아원이었다. 말수도, 표정도, 웃음도 잃어버린 세상에서 부모조차 잃은 고아들과 그 고아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고아원에 함께 사는 아이와 젤다만은 예외였다. 아이는 고아원에 사는 친구들,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


"조안 이모, 안녕하세요."


"제이미, 좋은 아침이야."


하지만 마스크로 입을 가린 고아원의 사람들은 누구도 아이의 인사에 응답하지 않았다. 오로지 젤다만이 아이의 인사에 반갑게 응할 뿐이었다. 젤다는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로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인사를 건네면 언제나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바꾸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젤다는 아이처럼 친구들에게 인사를 할 수는 없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와 젤다가 있는 고아원의 한 켠에는 작은 정원과 텃밭, 몇몇 가축을 기르는 사육장이 있었다. 사육장 안에는 닭과 오리, 토끼들이 있었다. 작은 정원 안에는 회색 빛 장미와 시들어버린 나팔꽃, 토끼풀이 섞여 있었다.


"젤다, 그거 알아? 장미는 원래 회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데. 옛날 사람들은 사랑을 고백할 때 붉은 장미를 선물하기도 했었데."


젤다의 눈동자가 신기하다는 듯이 커졌다. 젤다는 마스크 위의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고 아이에게 웃어주었다. 젤다의 눈을 바라보며 아이가 말했다.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이 세상에 빨간 장미가 피는 날 빛의 여왕이 사람들에게 다시 웃음을 되찾아 줄 거래."


토끼 친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던 젤다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젤다는 한동안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는 천천히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다. 아이는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내리면 크게 혼나기 때문에 젤다를 말리고 싶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젤다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입을 뻐끔거려 어떤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믿어.'


젤다는 다시 마스크를 올리고 아이에게 웃어 보였다.


5. 신이 내린 수수께끼


분노로 가득 찬 눈의 여왕은 얼음 기둥 위에 무시무시한 그림만 그려나갔다. 겨울 정원의 얼음 기둥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전쟁을 하고 있었다. 가을 정원의 얼음 기둥에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여름 정원의 얼음 기둥에는 홍수와 산불, 태풍과 지진으로 사람들이 집을 잃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눈의 여왕은 봄의 정원에 있는 얼음 기둥에 또 다른 무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눈의 여왕은 자신이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심부름꾼에 불과한 스노우, 정원의 흙 한 줌으로 만들었을 뿐인 스노우가 감히 신의 힘을 부여받은 여왕에게 연심을 품은 것을 발견하고 이를 신에게 알렸을 뿐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이 심부름꾼이나 하던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신경질이 솟구친 눈의 여왕은 가위손으로 얼음 기둥을 과격하게 긁어 나갔다. 봄의 정원에서 내리는 얼음 기둥의 조각은 지상에 비가 되어 내리지만 이날은 회색 우박이 되어서 맹렬하게 쏟아졌다. 지상의 사람들은 회색 우박에 맞아 다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눈의 여왕은 온 힘을 다해 얼음 기둥을 내리쳤고, 그러다 그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가위손으로 얼굴을 긁어서 상처가 생겼다. 눈의 여왕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분노와 슬픔이 섞여서 눈물이 나왔다. 눈의 여왕의 눈물은 눈가에 맺혀서 떨어질 듯 말듯하다가 이내 굳어서 수정처럼 얼어버렸다. 눈의 여왕의 눈물은 맑고 투명했다.


눈의 여왕의 비명 때문에 낮잠에서 깬 신이 나타났다.


"너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


신이 물었다.


"제가 언제까지 심부름꾼이나 하던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겁니까?"


눈의 여왕이 물었다.


"내 낮잠을 깨워서 다시 벌을 주려했지만 이번에는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내가 내는 수수께끼를 맞추면 너에게도 자유를 주겠다."


"수수께끼는 무엇입니까?"


눈의 여왕이 물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의 여왕이여.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사람)은 무엇이냐?"


신의 물음에 눈의 여왕은 잠깐 생간에 잠겼다.


"저는 누구도, 아무것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신은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6. 눈의 여왕의 깨달음


신이 수수께끼를 내고 사라진 뒤 눈의 여왕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자기는 아직까지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그 누구도,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의 여왕은 어쩌면 신이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를 낸 것은 아닌가 의심도 해봤다. 하지만 신을 의심한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의 여왕은 신이 내린 수수께끼에 정답이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눈의 여왕에게도 심장은 있었다. 하지만 눈의 여왕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해서 좀처럼 뛰는 일이 없었다. 눈의 여왕조차도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에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것)을 찾으라니.


눈의 여왕은 얼음 기둥에 그림을 그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눈의 여왕은 아직 봄의 정원에 있었다. 봄의 정원의 구석으로 걸어가 지상을 내려다봤다.


회색의 눈이 내린 뒤로 지상의 꽃들은 대부분 색을 잃어버렸다. 눈의 여왕은 회색 장미가 있는 한 고아원에서 작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지상의 모든 부분이 암울한 회색의 분위기에 잠겨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아원에 있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는 곳에서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눈의 여왕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하늘에서 쫓겨난 스노우와 빛의 여왕이었다.


눈의 여왕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확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봤다. 그때 여자아이가 천천히 마스크를 내리더니 남자아이에게 입을 벙긋거렸다. 소리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여자아이는 벙어리인 것 같았다. 여자아이의 입술은 투명하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 눈의 여왕은 '예전에는 장미도 그 입술처럼 붉었었지.'라고 생각했다.


인간으로 전락해버린 빛의 여왕과 스노우를 보고 나자 눈의 여왕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눈의 여왕의 심장이 이상하게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의 여왕 조차 그 감정이 분노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었다.


얼음 기둥으로 돌아온 눈의 여왕은 그날은 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왼쪽 가슴 안쪽에서 이상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눈의 여왕은 과거의 꿈을 꾸었다. 눈의 여왕은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스노우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스노우가 언제나 얼음 기둥에 비친 빛의 여왕을 훔쳐보거나, 그림을 그리면서도 빛의 여왕에게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스노우가 반갑게 인사를 걸 넬 때도 웃으면서 다정하게 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자기가 다가가면 스노우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스노우가 언제나 빛의 여왕만 쳐다보느라 자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질투도 났다. 스노우가 빛의 여왕을 쳐다보다 가위손으로 얼굴을 스쳐 상처를 내면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스노우가 볼에 상처를 입고 잠이 들었을 때 눈의 여왕은 몰래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찢어진 상처가 눈의 여왕의 키스로 아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의 여왕은 아직도 스노우의 볼에 키스를 했을 때 느꼈던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의 여왕은 신에게 수수께끼의 정답을 풀었다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난밤의 꿈은 사실은 꿈이 아닌 눈의 여왕의 기억이었다. 눈의 여왕은 낮잠을 마친 신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봄의 정원에 그림을 그려 나갔다.


눈의 여왕은 얼음 기둥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다. 눈의 여왕이 그린 그림은 스노우가 얼음 기둥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스노우를 둘러싼 주변은 장미가 감싸고 있었다. 눈의 여왕은 가위손으로 자신의 볼에 상처를 냈다. 가위손의 날카로운 끝에 눈의 여왕의 붉은 피가 한 방울 맺혔다. 눈의 여왕이 자신의 피 한 방울을 얼음 기둥에 가져다 대자 투명한 장미들이 붉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얼음 기둥에서 떨어져 나간 회색 눈의 파편들도 갑자기 다시 투명하고 하얗게 변해갔다.


그때 눈의 여왕 앞에 신이 나타났다.


"그래 수수께끼는 풀었느냐?"


신이 물었다.


"네, 수수께끼는 풀었습니다. 저는 스노우를 가장 사랑합니다."


신은 눈의 여왕의 답을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답이다. 너도 이제 다시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거라."


7. 기억을 찾은 젤다


젤다는 아이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탓에 눈을 떴다.


"젤다, 지금 밖에 하얀 눈이 내리고 있어."


젤다는 몽롱한 기억 속에서 지난밤 꿈의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지난밤 꿈에서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신에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젤다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 밖으로 회색 눈이 아닌 흰색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젤다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와, 정말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어."


젤다의 말을 듣고 아이는 그만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찢고 말았다.


"젤다, 너 방금 말했어.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젤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나 이제 다시 기억을 되찾았어."


젤다는 사실 벙어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기억을 잃은 젤다는 세상의 모든 단어도 잃어버려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와 젤다는 고아원의 밖으로 나와 정원에 갔다. 하얀 눈을 맞은 회색 장미들은 어느새 다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이와 젤다는 이제 더 이상 소년과 소녀가 아니었다. 아이와 젤다는 어느새 성큼 자라나 있었다.


하얀 눈을 맞으며 고아원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아이와 젤다도 마스크를 벗었다.


아이가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사실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말 기억해요. 그리고 당신이 내 상처 입은 볼에 입맞춤을 해준 것도요."  


아이는 젤다의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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