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짓말의 거짓말 Sep 14. 2023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by 무라카미 하루키

<1부> 


12p

네 옆에 앉자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든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네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 때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17p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에. 

내 손안의 어깨는 무척 매끄럽고 따뜻해서, 나는 진짜 너의 어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43p

가끔 네 꿈에 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매우 기뻤다. 어떤 형태로건 네 안에 있는 상상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너 역시 내가 꿈에 나타난 걸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네 꿈속에서 내게는 대개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는, 드라마의 조연 같은 역할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44p

너는 여러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56p

어젯밤 꿈 얘기를 쓸게. 

이 꿈에는 네가 조금 나왔어.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 미안한데, 꿈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도 그럴 것이 꿈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여기요' 하고 건네주는 거고, 나 혼자서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으니까(아마도). 그리고 어느 연극이나 영화에서든 조연은 중요하잖아. 조연에 따라 그 연극이나 영화의 인상이 상당히 달라지지. 그러니까 비록 주연이 아니더라도 좀 참아주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같은 걸 목표로 삼기를. 


71p

나는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두 감정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 도시에서 나는 더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철저히 외톨이라는 생각 사이를. 내 마음은 그렇게 정확히 둘로 쪼개져 있다. 


88p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슬픔을 오롯이 받아들인다는 건. 누군가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내맡긴다는 건. 

내가 좀더 강하면 좋을 텐데. 좀더 힘주어 너를 안고 좀더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단 한 마디로 그 자리에 걸린 나쁜 주문을 확 풀어버리는, 올바르고 적확한 말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109p

"나는 널 좋아해."

"고마워." 너는 말한다. "그렇게 말해주니 무척 기뻐. 하지만 그건 분명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일 거야. 만약 나를 더 잘 알게 되면-"

"만약 그렇다 해도 너를 좀더 잘 알고 싶어. 여러 가지를, 모든 것을."

"그중엔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을 거야."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연히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어지는 거야." 


110p

희미하게 눈물 냄새가 난다. 눈물에도 엄연히 냄새가 있구나, 나는 생각한다. 마음을 파고드는 냄새였다. 상냥하고 매혹적이고, 그리고 물론 어렴풋이 슬프다. 

"있지." 네가 말한다.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린다.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속삭이듯 말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급한 용건인지 주먹을 꽉 쥐고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소리가 텅 빈 방에 크고 또렷하게 울린다. 심장이 목까지 치고 올라온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어 그것을 어떻게든 제자리로 되돌리려 애쓴다.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말을 잇는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152p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이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172p

쓸쓸한 외톨이로 보낸 여름이었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176p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177p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 -혹은 마음의 잔향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212p

"그렇지만 너는? 수영할 줄 알아?"

그림자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양손을 펼쳤다. "난처하네. 보세요. 난 당신 그림자예요. 당신이 헤엄칠 때 나도 옆에서 똑같이 헤엄쳤다고요. 같은 페이스로 같은 거리를.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 우리는 나란히 나아가며 똑같이 헤엄칠 수 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얼굴에 차가운 눈을 맞았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야." 나는 ㅋ그림자에게 말했다. 


<2부> 


445p

"고야쓰 시는 돌아가신 부인과 아드님을 사랑하셨죠. 진심으로 아주 깊이 사랑했어요. 그렇죠?"

고야스 씨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제 변변찮은 인생에서 그 두 사람보다 사랑한 이는 없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야스 씨는 그 두 사람과 실제로 가정을 꾸리고 탄탄한 사랑을 키워가셨습니다. 안정되고 결실 있는 사랑을요."

"네,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말씀하신 대로랍니다."


447p

"살면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났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제법 진지하게 사귀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소녀만큼 누군가를 열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고, 대낮에 깊은 꿈을 꾸는 것 같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는, 그런 순수한 심정을 품은 적은요. 

결국 저는 그 백 퍼센트의 마음이 다시 한번 찾아와주기를 지금껏 기다렸나봅니다. 혹은 과거에 제게 그 마음을 가져다 주었떤, 그 사람을." 

(중략)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513p

항상 앉는 열람실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건 활짝 핀 꽃에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꿀을 빨아들이려는 나비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꽃에게나 나비에게나, 서로 유익한 행위다. 나비는 영양을 얻고 꽃은 교배에 도움을 받는다. 공존공영,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것이 독서라는 행위의 훌륭한 점 중 하나다. 


568p

"같은 반에 좋아하던 애 없었어요? 멋지다고 생각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지 싶어요."

"옛날부터 고독을 좋아했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나는 말했다.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게. 그럴지도 몰라요." 


635p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 - 이틀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 - 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682p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그녀를 원하는 마음은 열일곱 살 때 그 소녀를 원했던 마음과 같지 않다. 그때처럼 압도적인, 초점을 한데 모아 무언가를 불태울 것처럼 강렬한 감정이 몸안에 돌아오는 일은 아마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가령 돌아온다 해도 지금의 나는 이미 그 열량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커피숍 주인에게 내가 품은 마음은 좀더 넓은 범위에 이르는 것이며, 보다 온당하고 부드러운 옷을 두르고, 나름의 지혜와 경험으로 억제된 것이었다.  


<3부>


737p

"시간이 없으면, 축적이란 개념도 없는 건가?"

"네, 시간이 없는 곳에는 축적도 없습니다. 축적처럼 보이는 현상은 현재가 던져주는 잠깐의 환영일 뿐이에요. 책장을 한장씩 넘기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책장이 넘어가는데 쪽 번호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뒷장과 앞장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늘 현재밖에 없다?"


751p

"하지만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 그 이상은 알수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거에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냐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753p

"저는 공감이란 걸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제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아주 느리게나마 진보하고 있어요. 저는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작가 후기>


766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실루엣 by 시마모토 리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