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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Dec 23. 2023

죽음의 격 by 케이티 엥겔하트

12p

"의사는 '생명을 살리자! 생명을 살리자! 생명을 살리자!'라고만 배워요. 사람이 얼마나 끔찍한 몰골이 될 수 있는지 잊어버린다니까."


23p

오리건주 존엄사법에 따르면 말기질환을 앓고 살날이 6개월보다 짧다고 예상되어야 존엄사를 요구할 자격이 생긴다. 생존 기간 예측은 불분명한 의학에 근거하고 부정확하기로 악명이 높으므로 의사 두 명이 검증해야 한다. 환자는 18세가 넘고 오리건주에 거주해야 하며, 요청 당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의사가 보기에 정실질환으로 판단력이 손상됐다고 의심되면 별도로 정신 건강 평가를 받아야 한다. 환자는 죽고 싶다는 요청을 15일 간격을 두고 구두로 두 번 해야 하고, 증인 두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서명하여 주치의에게 서면으로 또 요청해야 한다. 법에 따르면 담당 의사는 통증 관리나 호스피스 치료처럼 조력사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공공장소에서 삶을 끝내지 말 것을 요구할 의무가 있다. 의사는 환자가 가족 구성원에게 알리기를 추천할 수 있으나 요구하지는 못한다. 이 법안의 중심에는 '자가 투여'라는 요건이 있다. 환자는 직접 약을 먹어야 하는데, (의사가 정맥으로 약을 주입하는) 안락사가 아니라 (환자가 가루를 녹인 용액을 마심으로써 치명적인 약물을 직접 먹는) 조력사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25p

또 세계 곳곳에서 나오는 반대 의견의 근간이 됐던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을 넌지시 언급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제한적으로라도 죽을 자유를 인정하면 그 자유를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법은 거침없이 팽창하고 또 팽창하면서 전에 없이 넓은 환자를 포함할 것이다. (중략) 

대법원 판사 벤저민 카도조가 말했든 모든 결정된 원칙은 '그 논리상의 한계점까지 팽창하는 경향이 있다.'


29p

죽음을 돕는 것이 합법인 곳에서 환자가 어떤 이유로 이른 죽음을 선택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오리건주 보건당국 자료를 살펴보면서 내가 가장 놀랐던 점은, 죽기를 요청했던 사람 대부분이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심지어 앞으로 느낄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압도적 다수가 생애말기의 '자율성 상실'을 가장 우려햇다. 그밖에 '존엄성 상실', '즐거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 상실', '생체 기능에 대한 통제력 상실' 등을 걱정한다. 


32p

이들은 나에게 '이성적 자살'을 언급했는데,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삶을 끝내는 행위가('절망 자살'이라고도 부르는 대다수 자살처럼) 충동이나 정신병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침착하고 냉정한 비용편익 분석에 따른 행위라고 했다. 


37p

나는 이 책을 위해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가끔 존엄성에 관해 물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사람들에게서 초월적인 지혜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유난히 죽음을 가까이 둔 덕에 나로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은 존엄성을 정확히 괄약근 조절과 동일시했다. 속옷에 똥을 싸거나 엉덩이를 닦아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만 삶이 존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간단했다. 


52p

로니가 말하길 환자들은 늘 '알약'을 달라고 하지만, 마법처럼 죽음을 선사하는 알약은 없었다. 사람을 고통 없이 빠르게 죽이는 일은 놀랍도록 어려웠다. 그런 용도로 개발되는 약도 없을뿐더러 의과대학에서도 사람을 고통 없이 빠르게 죽이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73p

오리건주에서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환자 991명이 존엄사법에 따라 사망했지만, 24명은 약이 역류했고 6명은 의식을 되찾았다. 이들 중 일부는 다시 시도해서 성공적으로 사망했지만 다시 시도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어는 환자는 죽기로 한 계획을 취소하고 시집을 쓰기 시작했다. 


81p

펜실베니아 병원에서 심각하게 아픈 60세 이상 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68.9퍼센트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죽음만큼 또는 그보다 더 나쁘게' 여긴다고 답했다. 나는 이 논문을 읽고 몹시 우울해졌다. 


82p

환자들은 종종 죽는 동안이나 죽은 후에 대변이 나오는지 물었다. 아니 다른 어떤 문제보다 그 문제를 많이 물어봤다. "모두 그걸 알고 싶어 해요! 저는 그냥 이렇게 말해주죠. '아니요, 아마 안 그럴 거에요. 하지만 똥이 나온다면 제가 아무도 눈치 못 챌 만큼 빠르게 치워드릴게요. 제가 그 작은 똥을 그냥 휙 체갈 거에요." 


89p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화를 유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설메이시는 이런 윤리 문제에 대한 침묵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데, 의사가 한때 본능적으로 괴로워했던 일에 무감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번 무감각해지고 나면 더 다양한 환자를 죽음을 원하는 환자로 여기기 쉬우므로 매우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미끄러운 경사길'이 의미하는 바다. 일단 도덕적 장애물을 넘고 나면 처음에는 어려웠던 일이 쉬워진다." 설메이시는 네덜란드에서 환자에게 안락사를 제공하는 어느 의사가 한 말을 인용했다. "처음 안락사를 수행할 때는 등산처럼 어렵습니다." 


113p

때로는 '제멋대로인 장'과 '피할 수 없는 실금' 때문에 하룻밤에도 서너 번씩 일어난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걷기는 무서워서 침대 아래 넣어둔 흰색 요강에 소변을 보곤 했다. 하지만 아침에 무거운 요강을 화장실로 가져가서 비울 힘이 없었다. 대신 요강을 끌고 방을 가로질러 손잡이가 긴 수프용 국자로 소변을 떠서 변기로 나르곤 했다. 


114p

1994년에 나온 베스트셀러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의 저자 셔윈 눌랜드 박사는 병원 행정가와 미국 보건복지부 지침이 내세우는 논리에 따르면 '노화 때문에 죽는 것은 불법'이고 '모든 사람이 이름이 있는 개별 원인으로 사망'해야 한다고 말했다. 


133p

갠지니는 말했다. "문제는 생애말기에는 우울증을 진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생애말기에 일반적으로 느끼는 슬픔과 우울, 비탄에 젖는 것과 대비해서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우울증 증상은 무엇일까요?" 노인정신의학 분야 내에서도 이에 대해 큰 인식 차이가 존재했다. 살날이 오래 남지 않은 노인 환자에게서 보이는 우울감과 절망감이 어느 수준이어야 정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실제로 의사들은 정확히 모른다. 


135p

메디케어 예산이 마르면, 노인의 이성적 자살을 나이 든 사람이 복지 재원을 고갈시키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사회적 책임을 지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 이미 매년 메디케어 지출 중 4분의 1가량이 생의 마지막 한 해를 보내는 환자에게 쓰인다. 


169p

스위스연방형사법 115조에 따르면 자살을 돕는 일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도움을 줄 때만 불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동기가 이기적이지 않다면 조력사가 허용되는 것이다. 형사법에서 정확히 무엇을 이기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동기로 구성하는지는 정의하지 않았지만, 스위스 당국은 언젠가부터 조력자가 죽음을 통해 금전적인 이득을 얻지 않는 한 도움을 주어도 괜찮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186p

무어라 정확히 말할 순 없었지만,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이 곁에 있으면 피곤해했다. 마이아 곁에 있으면 친구들은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아가 그들로부터 생명을 빨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마 건강한 사람은 마이아를 보면 죽음이 떠올라서, 그래서 마이아를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3p

"존엄사법은 장애인을 위협하는 법안입니다. 장애인은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에 섰을 때, 죽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게 최선이라는 식의 태도 말입니다." 켈리가 보기에 존엄사법은 '장애인이 되는 것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라는 관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성문화하며, 그 과업에 참가할 의사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206p

"마이아는 점점 어린애가 되어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예전에도 어린애가 되어가는 듯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는데, 대개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이나 생의 마지막 몇 해를 보내는 노인들이었다. 이런 노인들은 외부세계를 느끼는 감각이 누그러지고 둔해지면서 어린아이를 닮아가고 이기적이 되었다.  


223p

마이아는 말했다. "음모론은 안 좋아하지만, 이 현실이 모두 설계된 것이고 내 병을 만성 상태로 유지시켜 계속 돈을 벌기 위해 절대 치료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어요." 


237p

데브라는 자기가 개였다면 누군가가 오래전에 안락사시켜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데브라는 예전에 아픈 개를, 사랑했던 개를 안락사시켰던 적이 있는데 당시 어린아이였음에도 그 행동이 자비롭다는 것을 이해했다. "와, 사랑하는 친구의 괴로움과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니 정말 멋진 일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데브라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에게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


261p

데브라는 여러 가지를 잊어버렸다. 진료 예약, 단어, 저녁을 먹는 것. 무엇에든 흥미가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하는 말에 맥락도 사라졌다. 기분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고, 무심해지기도 하고 변덕스럽게 바뀌기도 했다. 컴퓨터 앞에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횡설수설한 내용을 가득 타이핑해 놓은 것을 발견하곤 했다. 


265p

언젠가 데브라에게 치매애 걸리면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되는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데브라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릴지, 아니면 애초에 느끼는 법 자체를 잊어버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느낌 자체가 사라질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병은 감각을 없애는 물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276p

치매에 걸린 사람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욕심이 많거나 근심 걱정이 가득한 가족이 의사조력사를 부추기지 않을까? 주변에서 강요하지 않더라도 환자가 이타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돈과 시간과 인내심을 걱정하며 빨리 죽음을 선택해야겠다고 느끼진 않을까? 


278p

2016년 '신경학 학술지'에 게재된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초기 치매 환자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존엄성 상실이, 자기가 망가진 모습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아는 것이 현재의 고통을 유발한다. 이는 안락사를 선택하는 치매 초기 환자들이 꼽는 주된 이유다.' 


282p

네덜란드의 의사들은 2개의 자아, 즉 치매에 걸리기 이전의 자아와 치매에 걸린 '지금의 자아'가 같은 사람인지를 두고 논쟁을 이어왔다. 만일 둘이 다르다면, 어째서 이전의 자아가 '지금의 자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

는가?


298p

애덤(27세)이 말했다. "강박장애는 악마에요. 생활이 순수한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유전자 카드 패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완벽하게 그런 사람 중 하나고요." 


345p

티앙퐁은 환자가 도움을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안락사 요청을 명확하게 거절하길 주저했다. 대신 요청을 '보류'해서 안락사로 가는 문을 열어두는 것을 선호했다. 티앙퐁은 이런 '미루기 전략'은 거절당한 환자가 절망에 빠져 죽음에 훨씬 더 집착하게 되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 돼요'보다는 '될 수도 있지만 나중에요'가 치료 과정을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중략)

티앙퐁은 죽을 수 있다는 승인을 받은 뒤 생기를 되찾는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시 삶을 생각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는 거죠." 


353p

여자가 안락사를 요청했을 때 바흐테르는 그 요청이 속임수 같다고 느꼈다. '도와줘, 그렇지 않으면...'이라고 위협하는 것처럼. 바흐테르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뒤 2004년의 어느 날, 여자는 시내 한복판에서 자신을 녹화하도록 카메라를 설치하고 분신자살을 했다. 그 자살 때문에 바흐테르는 안락사에 반대하는 입장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렇게 수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자기에게 그때 안락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 여자는 치료의 여지가 있었다고 믿었다. 


377p

"삶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버릴 수 있죠. 버리지 못한다면 선물이 아니라 부담입니다."


389p

퀼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늘 '사이비 대화'가 오고간다는 것을 알았다. 환자는 치명적인 약을 얻을 속셈으로 관절 통증이나 불면증을 호소하며 의사에게 거짓말을 한다. 의사는 환자를 안타깝게 여겨 속 보이는 속임수에 속아준다. 의사는 처방전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약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너무 많이 드시면 바로 사망에 이를 수 있어요." 


425p

2016년 네덜란드의 전체 사망자 중 안락사로 사망한 사람이 4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안락사로 사망한 누군가를 안다는 뜻이었다. 


431p

캐나다에 사는 서른을 넘긴 여자에게 '평온한 약 안내서'를 팔았는데, 그녀는 핵전쟁이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으며 대재앙을 대비해 넴뷰탈을 천장에 넣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필립이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완벽하게 일리 있는 말이에요."    


444p

질문은 계속 확장된다. 앞으로는 지원사 환자도 장기 기증을 할 수 있게 허락해야 할까? 그러려면 특정 장기를 건강하게 유지한채로 사망하기 위해 환자는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사망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또 존엄사에 관한 법률을 수정해야 한다. 장기 기증을 허용하는 김에 한 발 더 나아가서 이식에 성공할 확률을 극대화 하면 어떨까? 마취 상태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환자에게서 장기를 꺼낼 수 있게 허가해서, 이 수술을 마치면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방식은 어떨까? 분명이 어떤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환자는 관련 연구자가 '기증을 통한 죽음'이라고 부르는 이 선택지를 원할 것이다. 


458p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는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으로, 자기가 정의한 자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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