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는 정말 미치광이 폭군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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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는 역사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로마의 희대의 미친놈, 타락한 폭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대중들은 네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주로 어머니와 임신한 아내를 살해했다거나, 로마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도시를 감상하며 노래를 부른 일화 등을 떠올립니다. 이러한 일화를 바탕으로 네로는 난잡한 난봉꾼, 인민의 심판으로 무너진 폭군, 과대망상적이며 잔인한 황제, 사치스럽고 감정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부터 네로를 이렇게 사악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이미지를 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화입니다. 19세기 셴키비치의 역사소설 『쿠오 바디스』가 1901년 영화화 된 것을 시작으로,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흥행했던 영화 '십자가의 징표(The Sign of the Cross)'는 당시의 정치적 담론과 함께 네로의 잔악함과 방탕함을 극대화했습니다. 이후 영화에서 네로는 히틀러에 비유되고 연합국의 폭격기는 십자가로 그려집니다. 영화 속에서 네로는 '선'으로 그려지는 연합국에 반하는 '악'이 되는 것이죠.
특히 영화의 흥행을 위하여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영화제작자들은 네로를 방탕하고 소비주의적이며, 기독교인을 굶주린 사자의 먹이로 주는 잔인한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기독교 정신은 예전부터 서구 세계를 지배하는 주요한 담론 중 하나이므로, 기독교를 핍박하는 네로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절대악으로 뿌리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영화는 그를 우스꽝스럽고 무능하게 그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네로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네로의 이미지에 대한 정반대의 사료들이 존재합니다.
어느 다른 황제의 업적도 네로의 5년에(Neronis quinquennio) 미치치 못한다.
트라야누스, 로마의 다섯명의 현명한 황제 중 한 명
로마 5현제 중 한 명인 트라야누스 황제는 네로의 업적을 위와 같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네로 사후 로마의 시민들이 네로의 무덤에 꽃을 갖다 바쳤다는 기록과, 죽은 네로가 로마에 돌아와 인민을 구원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약 네로가 정말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폭군이었다면, 이러한사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 네로의 평가에 의문을 가져볼 필요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는 로마의 제정기 당시 황제를 역임한 인물로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기원후 50년에 숙부였던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고, 그가 죽은 후 54년 17세의 나이로 황제에즉위하여 68년까지 14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네로의 집권 초반기에는 당대 저명한 학자였던 세네카가 네로의 조언가로 활동하였으며, 네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공동 통치자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집권 후반기 62년부터 네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는 유명인사들을 탄압,견제하는 동시에 정치경제적으로 친평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정치세력은 '로마 시민- 원로회(귀족 엘리트층, 오늘 날의 국회 역할) - 황제'로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로마 제정기 황제와 평민은 원로원 귀족들을 견제하면서 일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황제는 귀족의 횡포로부터 평민을 보호하고, 평민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황제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 되어주는 형식이었습니다. 원로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친평민정책은, 당시 엘리트 귀족들로 하여금 네로에게 반감을 가지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주로 후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당시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는 지배계층, 곧 귀족엘리트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미움을 산 네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고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네로는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의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서 정치세력의 큰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동시에 로마의 원수정 체제(황제의 1인지배 체제)의 모순이 극대화 되고 있었다는 시대적 흐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네로에 대한 자극적인 기록들을 비판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로에 관한 세가지 일화를 살펴보도록 하죠.
1. 네로는 사치스러운 주연과 축제를 밤낮없이 열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2.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방화범으로,
'로마에 불을 지르고 언덕 위에서 불타는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른 사이코' 였다.
3. 네로는 사치스럽고 지나친 건축사업으로 국고를 낭비했다.
첫째. 고대문헌에서 네로는 사치스러운 주연을 열며 포식과 만취를 즐기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그의 주연은 이제 정오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졌고 따뜻한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거나, 여름철일 경우에는 눈 녹은 시원한 물에서 목욕하기 위하여 잠시 중지되었을 뿐이다.
수에토니우스, 로마 제국 오현제 시대의 역사가이자 정치가.
목소리 연습과 체육 훈련이 필요하였지만 네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식사와 주연에 소비하였다. 주연은 때로는 정오부터 자정까지 이어졌다.
그랜트, 근대 역사학자.
이처럼 많은 저술가들은 네로를 만취와 포식, 욕구 충족에만 몰두하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당시시대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면 이러한 평가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정기 황제가 베푸는 주연은 황제의 미덕과 제국의 부를 나타내는 일종의 정치적 행사였습니다. 모든 계층이 주연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황제는 자신의 자비로움과 인민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고 평민들과 노예들은 잠시나마 유력자들의 생활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 잘생기고 잘 차려입은 또다른 무리의 노예들이 좌석 사이로 들어온다. 일부는 빵 바구니와 하얀 냅킨, 그리고 더욱 화려한 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온다…… 한 식탁에서 모든 계층이 함께 식사를 한다. 아이도 여성도, 인민도, 기사들도 원로원 의원들도 함께한다……모든 이들이 황제의 손님이 된 것에 만족해 한다.
스타티우스, 고대 로마의 시인.
위의 기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기록입니다. 당시 주연은 황제의 자비로움을 보이는 동시에, 로마 인민의 일체감을 높이는 행사로 여겨졌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주연을 자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행위에 대하여 네로의 경우는 사치스럽고 방종한 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는 네로가 주연석상에서 상층민과 하층민의 구별을 두지 않아 귀족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주연석상에서 상층신분의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 별도의 좌석과 특별한 음식을 제공하는 등 그들을 '상층민답게' 대접했습니다. 상층 엘리트들은 하층민과 구별되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즐겼고 사회적 질서(곧 계층 간의 질서)에 대한 존중과 그에 걸맞는 사치스러움은 칭송받는 덕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네로는 사회 엘리트들로 하여금 노예, 검투사, 매춘부 등과 자리를 바꾸게 하거나, 황제 스스로 평민들과 함께 마시고 먹었습니다. 이는 귀족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평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며 그들의 인기를 누리는 네로가 귀족들에게는 틀림없이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둘째.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 방화범으로, '로마에 불을 지르고 언덕 위에서 불타는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른 사이코' 였다.
기원 후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그토록 화려했던 도시를 황폐화한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이화재로 인하여 로마의 전체 14개 지역중 4개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이 화재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주민들의 거주지역의 피해가 컸고 신전들과 예술품 등이 화재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네로가 방화범이라는 주장은 고대 학자인 수에토니우스와 디오의 글에 등장합니다. 이는 그 이전 시대 사람인 클루비우스 루푸스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글을 기록할 당시 루푸스는 네로 사후 등장한 새 왕조 아래에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이 네로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악의적인 비난을 지어냈다는 가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근대 학계에서는 대체로 네로의 혐의를 부인합니다. 화재 당시 네로는 로마시에 없었으며 인근도시인 안티움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네로는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황제의 저택에 임시 숙소를 세우는 한편, 공공 건물을 개방하고 시민들에게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을 로마 시민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는, 당시 로마에 "네로가 수도가 불타는 모습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후 "네로가 수도를 다시 건설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는 야심을 평소에 품고 있었다." 라는 소문이 추가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셋째. 네로는 사치스럽고 지나친 건축사업과 재정 지출로 국고를 낭비했다.
네로는 그의 임기 때에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목욕탕, 수로, 항구, 곡물 창고, 식료품 시장 건물,체육관, 격투기장, 전차 경주장, 신전 등 수없이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고, 공공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은황제였습니다. 이러한 네로의 건축사업은 고대 문헌 사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찬사는 문헌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건축분야야말로 네로가 가장 파괴적으로 돈을 낭비한 분야다.
수에토니우스.
그러나 네로의 건설공사는 그의 집권기에만 특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 황제들이 꾸준히 진행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는 아우구스투스 때도 활발하고 사치스러운 건축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의 건축사업은 경제적 필요성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통치자의 업적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으며 긍정적인 덕목으로까지 평가되었습니다.
문헌사료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화려한 기념물과 건축물로 인해 위엄 있고 훌륭한 황제로 찬사를받습니다. 네로가 세운 것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황제 자신을 기념함으로써 그 위상을 드높이는 한편, 인민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기본 생활에 필요한 공공 건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공공 건축사업을 통해 네로를 포함한 제정초기 황제들은 로마 평민들에게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했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더 편리하게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대문헌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와는 반대로 네로를 비판하기 위해서 네로의 건축사업을 언급합니다. 심지어 네로의 신전 건축에 대해서는 문헌사료에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않습니다. 당시 신전건축은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찬사를 받는 행위 중 하나였는데, 그들은 네로 황제가 신성한 신전을 건립하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네로가 귀족들에게 미운털이 아주 제대로 박힌 것 같습니다.
네로는 68년 3월 로마의 속주 갈리아의 총독인 빈덱스의 봉기를 시작으로, 그해 6월 자결함으로써 몰락했습니다. 네로의 몰락을 가져온 이 전쟁은 원로원 세력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보여지며, 당시 중요한 곡물 공급지였던 아프리카에서의 봉기로 곡물공급이 중단되면서 로마시민들의 지지를 잃은 점도 몰락의 한 요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내란은 다음 황제인 갈바의 즉위를 거쳐 내란의 승리자가 등장할 때까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역사』에서 네로의 몰락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로는 군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소식과 소문에 의해서 제위에서 쫓겨났다.
네로는 이복동생과 어머니를 살해하고 임신한 아내를 걷어차서 죽이는 등 도덕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일들을 자행했습니다. 이러한 네로의 행동은 절대 미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라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으로 그의 모든 업적을 매도할수는 없습니다. 원로원이 끌어내린 네로는 이후의 정치집단에게 '반드시 끌어내릴 수 밖에 없었던 악한 인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권력획득이 명분을 획득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물론 네로가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정당한 근거로 네로를 재평가했을 때 당시 로마 사회를 좀 더 정확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인물을 고립적인 존재로 보고 평가하기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집단과 사회의 모습을 함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인물의 인생이 온전히 그 사람에 의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대상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해관계에 놓여있는 특정 정치집단이나 대중매체에 의해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2000년 전의 소문이 오늘 날까지 이어져 사실화 될 정도로 상당합니다. 네로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쉽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들 중 온전히 사실인 것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세기, 너무나 많은 정보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한번 더 질문하고 한번 더 생각할 줄 아는 힘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네로황제연구』, 안희돈, 다락방, 2004
『(타키투스의)연대기』, 타키투스, 박광순 옮김, 파주, 범우,2005
『현대사를 바꾼 고대사 15장면』, 플루타르코스 외, 로시터 존슨 엮음, 부글북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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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트는 안희돈 교수님의 『네로 황제 연구』중 내용 일부를 요약, 참고하여 만들었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분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