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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ssical May 19. 2017

인종 해방의 구호 속에도 그녀는 없었다.

대의를 위해 침묵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


‘여자도 그런 일을 하나요?’


영화 '히든 피겨스' 중, 주인공 캐서린 존슨이 흑인 남성 장교에게 들어야 했던 말이다. 사실 그녀는, 무려 1960년대에 나사의 핵심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백인 남성들이 가득한 그곳에서도 눈에 띄는 수학 천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남성 장교에게 캐서린의 능력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캐서린은, 여자니까.



이 영화는 인종차별 문제를 전면으로 하면서 주로 흑인 여성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을 보여주지만, 영화 곳곳에서는 흑인 여성들이 같은 흑인 남성으로부터 겪는 성차별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메리 잭슨은 수학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며 나사의 엔지니어를 꿈꾸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에게 아내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렇게 흑인 여성들은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흑인 공동체 내의 성차별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흑인 공동체 내의 젠더 차별은, 어쩌면 인종차별만큼이나 가혹했다.


격변의 미국, 격변의 1960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60년대의 미국은 다양한 사회운동, 특히 흑인 민권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태를 시작으로, 마틴 루터 킹의 등장, 그에 의해 주도된 다양한 비폭력 민권운동, 그리고 60년대 후반의 흑인 민족주의와 블랙 파워운동까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1955): 흑인 여성 '로자 파크'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이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흑인들의 버스 승차 거부 사건.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들에 의한 지독한 착취와 차별에 침묵하지 않던 시기. 흑인으로 산다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아닌 자부심임을 외치던 시기. 1960년대는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 해방의 구호 아래에서도 흑인 여성들은 침묵해야 했다. ‘흑인의 권리와 자유’라는 구호 속에 흑인 여성들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야만적이고 더러운 흑인들!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흑인들을 멍청하고, 게으르고, 방탕하며, 음란한 인종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흑인들은 야만적이라서 우리 백인들에 의해 길들여져야 해.’


백인들은 흑인들을 ‘이상적인 인간’의 반대편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들을 인간답지 못한 존재로 설명하고자 했다. 백인 지배 사회에 의해 정의된 ‘이상적인 인간’이란 곧 남성성을 가진 주체로서, 자율적이며 지배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을 의미했다. ‘이들이 인간답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 폭행과 테러 행위는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인종차별주의는 정당화되었고, 흑인 노예제는 백인 사회의 안정을 위한 아름답고 그리운 제도로 묘사되곤 했다.


이때, 이러한 백인들의 정의에 따르면 오랜 기간 노예의 위치에 놓여있었던 흑인 남성들은 이상적인 인간, 곧 남성의 카테고리에 속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남성이었으나 남성으로 설명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과적으로 남성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흑인 남성들에게 자유와 인권의 회복, 인종 해방이란 곧 백인들에 의해 거세된 남성성의 회복과, 남성의 상징이 되는 가부장적 권력의 회복을 의미했다.


흑인 해방운동의 남성중심주의

흑인 남성들의 이러한 이해에 따라,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은 남성 중심적으로 조직되었다. 민권운동은 점차 모든 흑인이 아닌 ‘흑인 남성’의 정체성을 띄기 시작했다.  흑인 남성들은 민권운동 과정에서 여성이 목소리를 높여 투쟁을 주도할 경우 자신들의 남성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의 대중적인 활동이 자신들의 힘과 존재를 지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로시 헤이트(Dorothy Height)
워싱턴 행진 이전, 민권 집회가 있을 때마다
연단은 주로 남성들로 가득 채워졌다.
여성들이 연설하고자 했지만, 이들은 반대했고,
결국 여성들은 말하지 못했다.

 - 도로시 헤이트, 인권 운동가


남부의 모든 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슨 말을 하든지
남자가 하면 옳다고 여긴다는 점이었다.
남자들만이 모든 발언을 하고,
여성들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셉 티마 클락, 인권 운동가

흑인 남성들은 여성들의 활약이 두려웠다. 그들은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나설 것이 아니라, 흑인 남성들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도적이고 강인한 여성을 거부했다.


지워진 여자들

실제로, 흑인 여성 운동가였던 ‘엘라 베이커’의 이야기는 흑인 공동체 내의 남성 중심적인 권력 구조를 잘 보여준다. 엘라 베이커(1903-1986)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흑인 민권운동의 핵심 운동 단체*들이 조직될 수 있도록 힘쓴 영향력 있는 민권 운동가였다. 특히 그녀는 마틴 루터 킹이 회장으로 있었던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SCLC)*가 조직되는 것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엘라 베이커가 참여한 핵심 단체에는 1940년대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 1950년대 - 60년대 초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 1960년대 후반 비폭력학생협력위원회가 있다.


*SCLC :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1950년대 흑인 해방 운동을 주도한 핵심 조직. 흑인 남성 성직자들을 지도부로 하여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 많은 흑인 민중운동과 집회를 전개했다.


1955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마친 이후,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다른 운동가들은 그 다음 단계를 계획하지 않았다. 대규모 운동이 있었으니, 잠시 다시 계획을 잡아갈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기간은 끝없이 길어졌고 운동의 열기는 점차 소강 상태로 진입했다.

엘라 베이커(Ella Baker)

엘라 베이커는 이러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직접 흩어져있는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그녀는 흑인들이 차별에 분노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인종차별에 대해 유효한 발화와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마틴 루터 킹을 설득했다. 이러한 베이커의 노력으로 조직된 단체가 앞서 말한 SCLC다.


그러나 단체가 조직된 이후 단체의 지도부들은 실력 있고 노련한 민권운동가를 필요로 하면서도, 10년 이상 인종 해방운동에 몸 담은 엘라 베이커를 주요 직책에 앉히는 것은 반대했다.  


우선 여자, 게다가 나이 든 여자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교회 조직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하여 남성들, 특히 성직자들은 서열부터 따진다. 그들은 여성에게 지도부직을 주지 않았다…
 많은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성직자들이 인간의 평등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돌아와서는 사무실 직원을 개인 종 부리듯이
대하면서도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 엘라 베이커

결과적으로 그녀는 실질적인 주요 임무를 해내면서도 킹의 비서로 남아야 했으며, 직함 또한 책임자가 아닌 ‘직무대행자’였다. 마틴 루터 킹 또한 “여성들의 지위는 그녀의 남편의 후원자이자 그녀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본성적으로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엘라 베이커는,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킹의 카리스마를 가리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는, 마틴 루터 킹만 남았다.


"그녀들의 크고 검은 입은 닫혀야만 해."

이렇게 흑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종 차별의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의 목소리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조직에서의 배제는 운동 외부로까지 이어졌다. 백인 남성, 백인 여성, 흑인 남성까지 모두가 그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흑인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종적 차별뿐만 아니라 백인 남성에 의한 성적 학대와 착취까지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흑인 여성들은 백인 남성의 재산, 곧 노예의 수를 늘리기 위한 재생산도구로 여겨졌다. 또한 백인들이 흑인 여성에게 멋대로 씌운 '음란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성폭력과 강간을 정당화했고, 남편을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백인 여성들의 처벌까지 돌아왔다.


하지만 흑인 여성들이 자신들이 겪는 차별과 피해를 이야기할 때마다, 흑인 남성들은 그들을 ‘인종 해방이라는  공동체의 거룩한 대의’를 방해하는 방해자들로 여겼다.


‘지금 너희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일단 흑인 공동체 전부를 위해 우선되는 일을 해야지!’


그녀들의 이야기는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다. 오직 흑인 남성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만이 극복해야 할 차별로 인정되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흑인 여성들이 여성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당시 페미니즘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던 백인 여성들과 동일시하면서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여 내몰기도 했다.


그렇게 여성들의 목소리는 지워져 갔고, 분명히 존재했던 피해와 차별은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차별들에 대하여

흑인 해방운동 과정에서 남성들은 흑인의 자유를 위한 집단의 동질성과 인종적 단결을 강조하면서, 그 내부의 어떠한 다양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으니, 각각의 개인이 겪고 있는 다양한 차별의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없었다. 정의와 권리, 차별 반대를 외치던 어떤 이들은, 한편으로 누군가가 겪고 있는 차별을 차별로 인정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단순히 ‘백인이 흑인을 인종적 이유로 차별하는 것’ 정도의 단순한 명제를 떠올리지만, 사실 차별의 모습은 개개인의 젠더, 계급 등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 다양하고 다층적으로 나타난다. 즉 차별은 하나의 모습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차별들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의 권리가 보장되는 정의로운 세상, 인간다운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어떤 이를 소외시킴으로써 얻는 자유는 미완의 자유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차별의 경중을 평가할 만한 권리는 없다.  


우리는 위로 올라가면서 다른 사람들도 함께 끌어올려야 한다.

위로 올라가면서 모든 사회 계급의 자매와 형제들이
 우리와 함께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권력을 추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학이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안젤라 데이비스, 인권 운동가

"인종 해방의 구호 속에도 그녀는 없었다."


끝.



참고문헌


이 콘텐츠는 신혜숙의 논문 「인종, 젠더, 계급 사이의 흑인 페미니즘 : 미국 흑인 페미니즘의 태동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2014


를 요약, 참고하여 제작했습니다.


그 외,


김성훈, 「“You Don`t Have to Speak”: Silencing Women in the Montgomery BusBoycott」, 『한국영미문화학회』, 제 15호, 2015

김인선, 「엘라 베이커, 역사가 망각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 『역사와 경계』, 제 89호, 2013  

이창신, 「미국 여성과 또 하나의 역사 : '평등'과 '해방'을 위한 투쟁」, 『영미연구』, 제 6호, 2000

이춘입, 「미국의 블랙파워운동과 제3세계– 블랙팬더당과 흑인 여성을 중심으로」, 『한국서양사학회』, 제 128호, 2016

임지연, 「냉전 초기(1945 - 1960) 미국의흑인 민권 운동」, 연세대학교, 2004

박진빈, 「미국 흑인과 제2차 세계대전의유산」, 『한국서양사학회』, 제 125호, 2015

배성은, 「엘라 베이커(EllaBaker)와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SCLC)」, 『영미연구소』, 제 6호, 2000

배성은, 「엘라 베이커와 미국의 민권 운동 :SCLC를 중심으로」, 서울여자대학교, 1999

한설희, 「미국 민권운동과 마틴 루터 킹의 역할」, 1996,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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