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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ssical Jul 07. 2017

우리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불편했어야만 했다.

영화 다시보기 시리즈 1. 닥터 스트레인지 속, 당신이 보지 못한 불편함

2016년 하반기에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천재 외과 의사 스트레인지. 실력은 엄청나지만 매우 오만하고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이야기는 스트레인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교통사고로 외과의사로서 생명과도 같았던 손을 못 쓰게 된 스트레인지는 한참을 괴로워하다, 모든 병을 치유해진다는 에이션트 원의 서문을 듣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는 동양의 어느 신비한 공간, ‘카마르-타지’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마법 수련을 하는 사람이다. 

이 때, 에이션트 원이 살고 있는 ‘카마르-타지’는 동양, 그 중에서도 네팔을 배경으로 하는 신비와 치유의 공간이다. 스트레인지는 그녀를 만나 카마르 타지에서 정신적 수련을 받게 되고, 서양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던 손을 동양의 주술과 수련을 통해 치유 받게 되는, 동양의 신비스러움을 담아내는 인물이 된다.

 

이후 그는 치유를 넘어, 마법도 쓸 수 있게 되면서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소셔러 슈프림(Sorcerer Supreme)으로까지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결말이다.     


첨단 과학의 공간인 서양, 그리고 주술과 치유의 공간인 동양. 이렇게 <닥터 스트레인지>에는 동, 서양의 요소가 공존한다.      


그런데, 동양을 신비와 치유의 공간으로 상정한 것을 과연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할까?     


‘신비함’이란 개념은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는 매우 편향적인 단어다. 신비하고 기이하게 본다는 것은 동양과 서양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지 않고, 서양과는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보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동양에 대한 ‘타자화’다.     


영화 속에서 동양은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문명적인 서구와 완전히 대비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먼저, 닥터스트레인지가 의사로서 활동하던 서양. 첨단 장비가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도시에 고층 빌딩들이 세워져있는 등 문명적이고 과학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면 닥터 스트레인지가 몸을 고치기 위해 찾아간 동양. 향을 피우며 제사를 치루거나 개발이 덜 된 거리를 비추며 동양이 비문명적이고 주술적인 공간임을 암시한다. 낙후된 거리를 기이한 듯 두리번거리는 스트레인지. 스트레인지가 바라보는 동양의 모습은 ‘서양과 대비되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특히, 스트레인지가 네팔에 도착하여 카마르-타지를 찾는 장면에서, 그는 사람들이 모여 네팔 전통 의상을 입고 제사의식을 치루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쪽이  카마르-타지 같은데요.” 

그가 본능적으로 동양을 주술적이고 비과학적인 곳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 속 동양의 모습이 동양인들의 경험이 아닌, 스트레인지의 시선을 중심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은 동양이 스스로 정의되지 않고 서양인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서양, 또는 서양인이 동양이나 동양 문화에 대해 그들의 시각에서 만들어낸 태도나 관념, 이미지. 

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 말한다. 


이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서양은 오래 전부터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식민화하는 과정을 정당화해왔다.

그럼, 어떻게 해왔느냐.


먼저 오리엔탈리즘은 동,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 “구분할 수도 있지. 다른건 다른거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서양은 그들 자신을 동양과 구분해냄으로써 차이를 규정하고 결과적으로는 이 차이를 차별로 확대시켜 양자 간의 우열 관계를 생산해냈다. 이는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식민지 확대 경쟁에 몰두하던 영국의 관료 크로머(Cromer Evelyn Baring)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록 논리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유럽인은 타고난 논리학자이다 ...
이에 반하여 동양인의 정신은, 동양의 길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저히 균형을 결여하고 있다.
동양인의 추론은 가장 감상적인 것이다 ...(후략)”

 -크로머, <현대 이집트> 중-     

 

크로머는 유럽인, 즉 서구인은 논리적, 동양인은 비이성적, 감상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합리적이지 못한 동양을 서양이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동양을 주술적, 환상적인 곳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서양 스스로를 ‘그것과 다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그들의 우월함을 교묘하게 나타내는 것.  이것이 바로 ‘동양의 신비함’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서구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인 오리엔탈리즘은 전통적 학문뿐만 아니라 공적인 여러 제도, 여행기, 환상적인 이야기 등 오랜 기간 동안 특정 종류의 작품과 결부되며 확산되어왔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즐겨보는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소비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를 비롯한 오리엔탈리즘적 대중매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동양인인 우리조차 그들의 시각에 익숙해져 오리엔탈리즘적 콘텐츠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무의식적으로 아랍 및 동남아국가들은 우리보다 열등할 것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비판적인 자세로 우리 주변에 교묘히 숨어있는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을 읽어낼 줄 알아야한다. 그들이 주입한대로 동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동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우리 원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영화 다시보기 시리즈 - 1> '우리는 닥터스트레인지가 불편했어야만 했다.' 

끝. 



이 콘텐츠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정재서의 <동양적인 것의 슬픔>과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참고하여 제작했습니다.


그 외 참고문헌


- 강상종, 이경덕,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아산, 1998

- 오금동,「 벨로우가 본 서구 모더니즘, 그리고 문화적 오리엔탈리즘」, <동서비교문학저널> 19호, 한국 동서비교문학학회, 2008

- 박성창,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 동서 비교문학의 이론적 모색 」, <한국학 연구> 28호,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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