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많은데, 왜 나는 바뀌지 않을까

마르틴 부버와 삶의 분열에 대하여

by lala


철학을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는 깨달음과 실천이 합일 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사랑하라는 말에 감동하지만 직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던가, 깊은 사유를 하지만 주변 인간관계가 지난하고 피곤해질 때, 나는 무기력함을 느끼곤 한다. 통찰한 사유를 현실에 적용해보려 해도 실질적으로 뚫어내기가 쉽지 않고, 성경 말씀 한 구절이라도 실천하려하면 오히려 내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은 매 순간 되풀이되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고 나면 교회 안과 세상, 내 안의 사유와 현실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며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아가 분열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필연적으로 고립감과 외로움을 동반하게 한다. SNS에서는 활발하게 소통하지만 막상 인간과의 대면은 곤혹스러운 사람들, 교회에서는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지만 일터에서는 경쟁과 효율 뿐인 사람들, 나름 철학은 공부하지만 현실에서는 뒷걸음질 치고 무기력해지는 사람들. 지적 양식은 넘쳐 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살아 있는 만남’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사회의 관계)은 희미해져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채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이러한 현대적 병증을 꿰뚫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위기의 본질을 사유와 존재, 정신과 실존의 단절—곧 이원론에서 찾는다. "정신은 개인의 존재에 대한 구속력 있는 요청을 하지 못한다." 부버의 이 말은, 인간이 머리로 알고 있는 철학과 신념이 삶과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생각은 있지만, 그것이 나를 살리지 못한다. 믿음은 있지만, 그것이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처럼 사유가 실존을 부르지 못할 때, 인간은 병든다. 정신은 공허하고, 존재는 고립된다. 나는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자가 되고, 결국에는 믿음도, 지식도, 말도, 삶도 따로따로 떠다니는 파편이 된다.


마르틴 부버가 이러한 현대성의 병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나-너 관계”의 회복이다. 진리가 추상적인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너와의 만남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사상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만남, 책임, 응답성 안에서 진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을 품고 말하고 있는가?”보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응답하고 있는가?”를 물었던 사람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 ‘너’를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나도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성경 구절처럼 진리는 개념이 아니라 살 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부버는 철학을 일상 속으로 끌어내렸고, 신앙을 관계 안에 뿌리내리게 한 철학자였다.


철학적 사유와 신앙의 깨달음은 분명 지적 희열과 마음의 안식을 제공해준다. 세상에서 그 누구와 대화가 통하지 않더라도 책 한 권을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본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열과 안식이 내 마음 안에서만 고여 있을 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 또 다른 고립감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내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 그 아름다운 빛은 거울이 되어 나의 고립을 비추어 준다. 내 안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해갈하기 위해 철학과 신앙을 붙잡았지만 깨달음이 나를 또다시 고립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 혼자만 사유하는 방을 나서야 한다. 철학과 신앙의 사유를 현실에 옮겨놓는 것—그것이 나를 살린다. 설령 그 시도가 바다 위 자맥질처럼 허망하게 보이더라도, 적어도 나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말과 삶, 정신과 육체, 신앙과 관계가 한 자리에 모이는 순간, 존재는 처음으로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순간이, 온전한 나를 향한 여정이 된다. 실패해도 좋다. 넘어져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가 나의 전존재로부터 출발한 응답이라는 점이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내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라는 실존이다. 그 실존이 다른 존재를 향해 몸을 기울일 때, 말은 살아나고 신앙은 걷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 실천은 아주 작은 발걸음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해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커피를 건네는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일. 거래가 아니라 존재로서 서로를 마주하고, 눈을 맞추는 일. 그렇게 전해보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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