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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by lala

“3년을 봤는데.”

서연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역시나 안 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하아, 하고 저절로 짙은 한숨이 뱉어져 나왔다.

“그치, 3년이나... 봤지.”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심장이 뻐근하게 아팠다.

“응. 더 안 봐도 될 것 같아.”

서연이가 내 손 안에 쥐어진 휴대폰을 꺼내가며 말했다.

“아...”

뭘 기대했던 건가 싶었다. 누군가한테 세게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숨 쉬는 게 어려웠다. 서연의 말 한마디, 호흡 한번이 내 마음을 맷돌처럼 짓누르고 갈아대는 듯했다.

“좋아, 나도.”

그때 서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어? 아, 와...”

나는 놀라서 어깨를 움칫했다가 하마터면 임서연을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고마워.”

그날이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마음을 확인한 다음부터는 더 정신없이 쿵쾅거리는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거나 오글거리는 문자를 보내고 냅다 침대에 던져버리는 날들이 쌓여 갔다. 학교 복도에서 마주칠 때도, 학생회 활동을 같이할 때도, 학원에서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을 때도 눈길은 임서연만 좇아갔다.

어떻게 이렇게 보고만 있는데도 계속 보게 되는 건지, 아니 어떻게 이렇게 오래 보는데도 질리지 않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좋아했던 시간은 3년이었는데 막상 여자 친구로 곁에서 바라보니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 좀 봐.”

“싫은데.”

나는 늘 옆자리의 책상까지 상체를 기울이고는 머리를 괴고 서연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연은 자기 얼굴 좀 그만보고 책 좀 보라고 뭐라고 했지만 나는 서연이 얼굴 보는 게 제일 재밌었다. 아니, 이건 애초에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동적으로 눈길이 향하고 몸이 다가갔다. 서연은 부담스럽다며 의자를 옆으로 빼고 멀어지려 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의자를 내 쪽으로 더 바짝 끌어오고는 했다. 그 당시에 나는 사랑받으려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애가 닳았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이런 날 등신이라며 좋아하는 티 좀 숨기라고 놀려댔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숨겨야 한다나. 난 그게 가능한 건지 도리어 묻고 싶었다. 어떻게 좋아하는 걸 숨기지. 그건 임서연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다고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진짜 임서연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을.

처음에는 서연이 옆에 감히 딱 붙어 있는 놈이 누구지? 라고 생각했었다. 내 자리여야 하는 곳에 키도 크고 몸도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애가 서 있었다.

“서연아?”

눈은 그 남자한테 고정돼 있으면서 임서연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곧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를 보았을 땐 순간 나는 멈칫했다. 남자가 아닌가? 새카맣고 긴 앞머리 사이로 길게 뻗은 무쌍의 눈매가 보였다. 피부는 지나치게 하얀 편이었는데 약간 매부리가 있는 높은 코 탓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렸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나른한 퇴폐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청량하고 단정한 서연과는 너무도 극명하게 분위기가 갈라지는 터라 나란히 함께 있는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다.

“같은 반 친구야, 최도윤.”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데 이상하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빛이 날카로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스캔을 당한 건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최도윤은 서연이랑 팔짱을 끼고는 바로 등을 돌려 저만치 걸어갔다.

당황한 서연이가 나를 쳐다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게 보였다. 뭐지? 서연이가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나온 자리였는데 왠지 내가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하고... 뭐 드시겠어요?”

주문대 앞에 선 나는 최도윤을 쳐다보며 물었다. 명색이 남자 친구인데 이 정도는 매너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서연아, 차가운 것보다 따뜻한 게 낫지 않아? 너 이번 주 컨디션 안 좋잖아. 나랑 따뜻한 카모마일 티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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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로서 첫 에세이 <사랑에 빚진 자가 부치는 편지>, 장편소설 <러브 알러지>,<레드 플래그>를 집필 했습니다. 《보기 좋은가 바오》2025 대산창작기금 소설 부문 본심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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