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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

by lala

잠시 뒤 열림 버튼이 눌리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현관문이 앞으로 휙 잡아당겨졌다. 그 바람에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내 몸도 용수철처럼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무슨...”

말을 맺기도 전에 커다란 두 팔이 내 몸을 감쌌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아줌마의 겨드랑이 안에 갇힌 나는 진하게 풍기는 된장찌개 냄새에 잠시 신물이 올라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가 마지막 식사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침 있었네, 서연 엄마!”

아줌마는 내 두 팔을 거센 손으로 꾹 붙들고는 앞뒤로 흔들어 재꼈다. 순간 마주친 눈빛에 겹겹이 중첩된 메시지들이 아프게 전달됐다. 딸아이가 그렇게 됐는데 잘도 살아있네, 오죽했으면 애가 뛰어 내렸을까, 조용했던 아파트에 웬 소란이야. 음소거 된 채 마음속에 꾹꾹 담겨져 있을 말들이 이상하게도 내 모든 열린 구멍으로 다 들려오는 듯하다.

“아니 소식 들었어요. 서연이가 난간에서 떨어졌다고. 무슨 일이야, 이게?”

내 팔을 꾹 붙든 아줌마는 현관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말했다.

“애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는 거야, 그럼?”

“아, 네. 저도 이제 막 병원 나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나는 여전히 현관문 앞에 서서 허락도 없이 당당하게 거실로 걸어 들어가는 아줌마를 향해 말했다. 흘깃 벽시계를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이 이러쿵저러쿵 얼마나 말들이 많았을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휴, 그러니까 내가 저 정신 나간 남자 좀 단속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어! 언젠가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니까.”

아줌마는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화난 얼굴로 팔까지 걷어붙이며 말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네?”

“504호 그 또라이가 그런 거라면서! 이거, 아파트에서도 무슨 조치를 해야지. 이래서 무서워서 같이 살겠냐고.”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고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비칠비칠 걸어가서 아줌마 앞에 섰다.

“아줌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니, 504호 그 미친놈이 서연이 밀쳐서 사고 난 거 아니야? 아들이 그러던데.”

아줌마는 얼빠진 채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좀 전보다 한층 목소리를 낮추며 되물었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504호 남자라면 워낙 소문은 무성했다. 사업을 하다가 말아먹어 충격을 받고 정신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둥, 외출 할 때마다 야구 배트를 들고 휘두르고 다닌다는 둥, 항상 같은 시간에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닌 다니며 여자애들 뒤를 쫓아다닌 다는 둥 말은 허다했다. 고등학생 딸을 둔 부모 입장에서 전혀 달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바로 아래층 사람이어서 딸아이와 혹여 마주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였다. 그 남자를 감시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두어 달 전부터 떠도는 소문에 의지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모눈을 뜨고 확인했다.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 남자는 환자 치고는 상당히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보였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아침 9시에는 야구배트를 움켜쥐고 산책을 나섰다. 옆 아파트를 끼고 산책로를 두어 바퀴 돌다가 집에 들어오면 뭘 하는 건지 집에 박혀 있다가 또 늦은 오후 5시에 집밖으로 나왔다. 서연과 부딪치게 되는 시간은 늦은 오후 빼고는 없었다. 나는 알게 된 정보들을 서연의 귀에 딱지가 들어앉을 정도로 말해주었다. 학교에서 바로 집으로 귀가하는 날에는 절대 엘리베이터 혼자 타지 말라고 그렇게도 신신당부를 했던 터였다. 순간, 큰 키에 마른 체구로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외로 꺾은 채 종종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504호 남자가 스쳐지나갔다.

“이상하네. 아니, 그날 아들 상엽이가 볼 일이 있다고 집에 잠깐 방문했거든. 나는 아쿠아 운동 하느라고 집에 없었고. 하여튼, 상엽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웬 러닝셔츠 입은 남자가 서연이네 집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서 있더라는 거야. 아, 그래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손에 야구 방망이를 쥐고 있더래.”

나는 허물어지듯 소파 위에 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어지럼이 밀려왔다. 꼭 감은 두 눈앞엔 흰빛이 소용돌이치며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정신을 모으고 두 눈을 뜨는 게 어려웠다.

“어머, 서연 엄마. 괜찮아?”

“그니까... 그... 504호 남자가 우리 집에 침입했다는 거예요?”

나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띄엄띄엄 물었다. 혀가 마비된 것처럼 굳어서 말이 자연스레 떨어지지 않았다. 504호 남자가 서연을 덮치는 장면들이 시시각각 다른 버전으로 머릿속에 시뮬레이션 되었다.

“그래, 러닝셔츠 차림에 방망이 들고 다니는 사람이 504호 말고 더 있어? 그 아저씨 정신이 이상해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그 아저씨 아내도 문제야. 아니, 남편 정신이 온전치 못하면 집 안에만 있게 해야지. 하여튼 안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들어갔다더라고. 상엽이도 놀라가지고 따라 들어갔고.”

아줌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만큼은 눈에 뭐가 씌었던 것 같다. 문밖을 나선 나는 두세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는 연신 서연 엄마를 외치는 앞집 아줌마 목소리가 꽥꽥거리며 나를 뒤쫓아 왔다.

쿵쿵쿵쿵. 불끈 쥔 주먹으로 504호 문을 부셔져라 때렸다. 들이키는 산소가 희박해지고 호흡하는 게 가빠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잠시 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문을 홱 잡아당겼다. 러닝셔츠 차림의 남자가 맹하니 서있었다. 바로 주먹이 남자 얼굴로 튀어나갔다.

“어억...”

볼을 감싸 쥔 남자가 반쯤 몸을 접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연거푸 남자의 머리통, 어깨, 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난건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뒷걸음질 치며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 뭐야?”

뒤에서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새된 고성에 귀가 찢길 것만 같았지만 내 눈에는 온통 러닝셔츠 차림의 남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린 나는 그대로 그를 신발장으로 밀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부딪친 남자가 아이씨,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새끼야, 너야? 개자식아, 네가 그랬어?”

멱살을 쥔 주먹을 앞뒤로 흔들자 남자의 몸통이 뒤따라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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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로서 첫 에세이 <사랑에 빚진 자가 부치는 편지>, 장편소설 <러브 알러지>,<레드 플래그>를 집필 했습니다. 《보기 좋은가 바오》2025 대산창작기금 소설 부문 본심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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