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람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쪽맑은물 Oct 26. 2022

공명통

  이마를 덮는다. 한쪽 눈을 덮는다. 가슴이 뛴다. 다른 쪽 눈도 덮는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코와 입을 덮는다. 숨이 막힌다. 이제 앞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눈을 뜨면 진득진득한 물체가 눈에 들어가고 입을 벌리면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다 둑이 무너지듯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처음 마사지하러 이곳에 온 날,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바이올린 울림이 나를 달리게 하고 멈추게도 하며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게도 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그토록 질투했던 살리에리와 결코 맞수가 될 수 없는 모차르트. 천부적인 능력을 소유한 자의 천진함과 철없고 격식 없는 모차르트의 어리고 여린 웃음(영화 아마데우스 / 나의 감상)을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영화 장면을 떠올리니 음악은 더욱 마음을 풍성하게 했고 다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마사지 재료가 얼굴에 붓칠 될 때, 깜짝 놀라 몸이 긴장하였다. 재료의 차가운 감촉과 더불어 눈과 입 그리고 코를 다 막아버린 가면 형상. 하필이면 무절제한 생활로 가난한 말년을 장식했던 모차르트의 안타까운 삶이 떠오를 때,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몹시도 궁핍한 모차르트가 생각날 때 말이다. 마사지를 이렇게 해야 하는 건가, 피부가 좋아지기는 하나, 영양분이 좋은 재료이기는 한가 등등 퉁퉁거리는 마음이 생기면서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이 막혔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손으로  의사를 표현하려 해도 그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이미 미용사는 자리를 뜬 상황이었다. 그러니 팩이 굳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함유한다. 보고 싶은 마음과 그리움이 커서 눈을 감고 사랑한다는 말이 모자라 눈을 감는다. 긴 기다림으로 눈을 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눈을 감는다. 떠나는 뒷모습이 보기 힘들어 눈을 감기도 하고 옛날이 부끄러워서, 아픈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눈을 감기도 한다. 순수한 것을 본 대가로 눈을 감기도 한다. 신의 존재를 피할 수 없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몸짓으로도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았던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니 깜깜한 눈 뒤에 있던 불안한 형상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감추고 싶었던 회오의 흔적들, 세상 계산과 맞물려 이성을 잃었던 순간들이 더욱 윙윙거렸다.

  자의적으로 눈을 감았던 일들은 내 선택이고 내 감정이고 내 표현이었다. 나의 언어였고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그 이상의 대화였다. 그러나 타협 없이 내가 볼 권리와 말할 권리를 박탈하는 이유를 막혀 있는 입으로는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있을 수밖에. 그런데 삶이란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절박한 삶이 떠올랐을까.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기다려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더욱 힘들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삶은 지나가지만, 기다리기 전에 준비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리하다 보니 질곡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나 들을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더욱 섬세해지는 청각이 감지덕지다. 그 느낌이 바이올린 선율로 이어져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아름다운 음악이 나래를 펼치며 춤추기 시작했다. 내 귀는 맑아지고 심장박동도 점점 안정을 찾았다.

  악기의 좋은 소리는 공명통에서 난다. 줄의 움직임은 공명통에 보내는 신호이다. 텅 빈 통 속에서 제각각 소리가 아름다운 운율이 되어 밖으로 나온다.  무한한 시공간을 날아다닌다. 바이올린의 섬세한 소리는 몸통에서 몇 바퀴 휘돌다 나의 귀청을 때리고 마음으로 전해졌다. 그 소리가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바이올린 소리에 점점 빠져들었다. 굳이 보려고 애쓰는 것이 미련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아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울림으로 불안한 마음이 느슨해지고 너저분한 것들을 쓸어내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쌓아 놓은 현상의 집착과 그들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지식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선율로 전하고 있었다.  


  내가 뱉은 말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말이  그렇게나 많았다니.   폼 나는 대화를 위해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모으기에 급급했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장황하고 과장을 일삼았던 일들도 떠올랐다. 사실보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말들, 듣기보다 말하기에 공들였던 일들이 생각났다. 듣는 일에 마음을 열어보려고 했었지만 잘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민만 했던 일, 그러다 타인에게서 이유를 찾았던 일들. 나에게 너그러운 해결책, 촘촘하게 나를 방어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눈과 코, 입이 막힌 속수무책인 상황이 되니 저절로 고해성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 마무리해 드릴게요.       


  순식간에 팩이 벗겨진다. 형광등 불빛이 감긴 눈을 뚫고 나를 녹여 주고 있다. 여전히 바이올린 소리는 아름답다.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진실의 밝은 소리가 들리고 진실의 실체가 보인다고 했던가. 터져버릴 것 같던 심장 박동은 제자리를 찾는다. 불안한 형상들이 내 마음 울림통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포옹한다. 규칙적인 심장박동이 바이올린 선율과 아름다운 리듬을 탄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둥둥, 손가락 움직임과 손끝 압력과 손톱 감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