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한강, 문학동네, 2021)
쓸쓸함은 갑작스레 조용함이 다가왔을 때, 어리둥절하다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와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기분이 들 때, 옆에서 말하던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의 정적 같은 것. 지겨운 일이 즐거운 일이었다는 것을 몇 분도 되지 않아 알게 될 때, 갑자기 생각나는 장면 같은 것. 마치 폭설처럼 마음과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이야기 같은 것. 제주도는 이렇게 쓸쓸한 이야기로 이곳저곳에서 발길을 멈춰 세운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는 한동안 세상에 만발한 모든 꽃이 희디흰 눈처럼 보였다. 그것은 차가운 작별이었지만 절대 작별하지 않겠다는 아우성으로 들렸다. 만지면 사라지는 눈, 너무 희어서 눈이 부신 흰 눈처럼 시리게 아름다운 제주의 으스러짐이 다시 살아났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4·3 안내문을 그냥 스칠 수 없었다. 안내문은 악몽이다. 악몽은 기억이다. 악몽은 생명을 도굴해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살아있는 누구도 곁에 남지 않으리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소식 없는 이가 돌아오리라는 생각이 정말 꿈이어야 한다면…. 혼과 손을 잡고 눈을 맞추었던 꿈을 어찌한단 말인가. 악몽은 빛이 없다. 그래서 무섭다.
“꿈이란 무서운 거야.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237쪽)
경하는 인선의 친구다. 제주에 사는 인선의 엄마를 만났을 때,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인선의 아버지와 외삼촌과 이모의 이야기를. 회오리 같은 제주 역사의 애끓은 수많은 사람의 사연을.
작품에서, 경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고통과 암흑의 폭로로 이어진다. 아마 경하의 악몽은 광주의 오월처럼 제주의 사월을 잊을 수 없는 한강 작가의 폭로가 아닐까. 모든 것을 폭로하는 것이 꿈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선의 엄마가 사용하는 이불 밑에 있는 칼은 불합리한 시대를 향한 저항과 결투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인선의 아버지와 외삼촌, 그리고 수많은 제주도민의 목숨을 지키기에는 너무 무섭고 슬펐고 아팠기에 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해야 했던 힘없는 보통 사람들.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피칠갑하는 권력의 무차별 폭력은 인간의 속성 중 가장 지독한 악성이다. 인간의 피둥피둥한 악성에 등급을 매기는 일이 비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부조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들이 최악의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인선의 손가락 봉합 사건은 시대 아픔을 이야기한다. 온 마음과 몸이 피가 통하지 않는 삶을 사는 현실은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삶이다. 실재할 수 없는 이야기가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삶은 붕괴한다. 심장이 터지고 눈이 흐릿해지며 소리의 진동이 멈추고 기이한 도약이 멈춘다.
이 작품은 한동안 마음 둘 곳이 없어 헤매는 시간을 허락한다. 험한 사건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고 그 분통함을 잊지 않았으면서도 또 다른 형태의 분노가 마음을 휘젓고 휘청거리게 한다. 소리 없이 울려 퍼진 어두운 공포를 세밀화처럼 더 자세하게 보게 한다. 작품은 생생한 꿈이다.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꿈을 꾸는 자는 작가다. 작가, 한강은 작품을 퇴고한 후, 악몽에 시달릴 것을 알면서도 소설이라는 세밀한 작업을 했다. 어쩌면 작품이 악몽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이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차별한 공권력의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힘주어 말하고 싶었는지도.
폭설이 내리지만, 인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경하가 새에게 물을 주기 위해 당장 서울에서 제주도로 가야 하는 설정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존엄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설득력이 필요할까. 생명을 살리는 행위에 어떤 당위성이 필요할까. 새를 살리는데 폭설이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그깟, 새 한 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을 먹지 못해 죽을 수도 있는 새장의 새는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명이다.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 생명체가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새의 죽음은 사람을 장난감처럼 줄 세워 총질한 지난날의 무지를 고발한다.
최선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듯이 결국 새는 죽는다. 언젠가는 죽는 생명처럼, 어렵게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는 새의 죽음을 확인한다. 꿈을 꾸다 죽었을지 모를 새는 모든 만물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삶이 존중되어야 하듯이 죽음, 또한 그렇다. 새의 죽음을 존중하는 경하의 마음은 참으로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속성이다. 선과 악이 양립하는 인간이지만 그 차이가 개인의 속성을 구성한다.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부피와 무게와 밀도가 절대 같지 않은 선과 악의 분포도. 주사위 던지기처럼 확률적인 일도 아니다.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만물의 존엄은 결코 죽을 수 없다.
생과 사의 변곡점에서 잠시 멈춘다. 점과 점 사이 선으로 이어진 삶은 다양한 생각으로 채워지며 방향이 된다. 방향으로 향하는 행동은 서사를 만든다. 서사는 무수한 변곡점으로 이어진 색과 무늬가 된다. 그러데 그 변곡점에서 희생을 강요당한 인생이 있다면 그 변곡점을 찾아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까. 꽤 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겠지만 분통함을 벗 삼아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봉인된 진실은 언젠가 해제되어 악몽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면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빡이는……. (316쪽)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노력을 넘어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악몽에서 헤쳐 나오기가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알았을까. 악몽은 공포에 짓눌려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일까. 사실에 근거한 허구로 옷을 입힌 이야기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고발하고 동참하는 개연성이 필요하다. 허언이 아닌 사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 그것이 몽유병이나 환상통 같아도 함께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종의 구역질 같은 희미한 반발 같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