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랑 살아요

『느티나무 수호대』(김중미, 돌베개, 2023)

by 남쪽맑은물

“저 나무에 도깨비가 살아. 도깨비는 요괴야. 베트남에도 오래된 나무에 요괴가 있어.”

“엄마, 도깨비는 사람 안 해쳐. 요괴랑 달라. 한국에는 도깨비 얘기 많아. 그림책이랑 동화책에도 나와. 그 도깨비들 하나도 안 무서워.”(125쪽)

김중미 작가의 작품 『느티나무 수호대』는 대포읍 재개발 소식으로 어쩌면 사라질지 모를 느티나무 이야기다. 그리고 그 나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사계절 이야기다. 느티나무는 어떻게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어쩌면 어떤 새의 뱃속에 있던 씨가 나무의 뿌리였을지도 모른다. 새는 죽고 씨는 살아 흙속으로 들어가 스며드는 물기와 함께 땅속에서 숨을 쉬었을 생명. 씨앗이 자라 아침마다 해를 받고 저녁마다 달과 조응하는 나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수없이 보내온 생명. 기름진 땅속으로 뿌리를 깊게 내리는 동안 가냘픈 가지와 잎사귀를 돋우고 바람과 햇빛과 어둠과 안개와 비와 폭풍을 견디며 살아온 생명, 느티나무.

어느 날, 청소년들은 댄스 대회에서 수상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무의 존재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현실문제에서 청소년들은 생명에 대한 열정이 활활 타오른다. 당산나무가 된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과 마을을 지켜 온 숲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다. 만물의 움직임이 조용한 겨울을 보내면 생명의 활기를 깨닫게 되는 봄이 오는 것처럼 청소년들은 생각한 것을 행동한다. 어떻게 하면 사라질지 모를 느티나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청소년들은 대회에서 상을 받은 춤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지면 많은 사람이 숲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 관심이 숲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때, 느티나무에 사는 도깨비 같은 정령, ‘느티샘’이 나타난다.

‘느티샘’은 누구일까. 느티나무에 사는 상상의 인물이다. 늙지 않는 ‘느티샘’은 어른다운 어른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마을에 존재하고 있다. ‘느티샘’은 사람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존재다. 느티샘은 “호모 사피엔스는 고작 25만 년이지만, 식물 역사는 4억 년이 넘는다. 그 시간을 버티며 살아남으려면 식물에도 많은 정보와 경험,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인간 방식과 다르게 식물은 뇌세포가 몸 전체에 흩어져 있다. 하늘을 향한 우둠지와 나뭇가지, 이파리, 그리고 뿌리와 잎을 연결하는 수많은 세포가.”(172쪽)가 있다고 말한다. 느티나무에 사는 ‘느티샘’을 누구는 정령이라 부르고 누구는 도깨비라고 부른다. ‘느티샘’은 이렇게 저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 않다.

느티나무에 사는 도깨비 이야기,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나무 정령 이야기. 만약에 정령이 요괴가 되어 사람을 괴롭힌다면 나무는 두려운 존재다. 그러나 정령이 친구가 되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연대하는 정신이라면 나무는 다정한 존재다. 친구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닌가. 그러니 이 작품에 등장하는 느티나무는 친구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는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도 있지 않겠는가. 나무 안에서는 국적, 피부 색깔, 말투 따위로 상처를 주거나 따돌림받는 일이 없다. (199쪽) 공부하건, 뒹굴뒹굴하건, 아무래도 괜찮다.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느티나무에서는 웃는다.

느티나무의 이름은 홍규목이다. 1943년 등기가 있는 나무다. 홍규목 옆에 700살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불을 질러버렸다. 독립 의지를 꺾고 마을 공동체를 와해하려는 목적에서 일본인들은 정월 대보름, 단호제, 추석에 하는 당산제 농악대를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보았다. 당산나무를 사라지게 한 것은 사람들 공동체를 무력화하려는 만행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간직한 숭고한 의지를 꺾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추악한 행동으로 나타났지만, 다행히 그 옆에 있던 홍규목은 불에 타지 않았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이 홍규목을 지키려는 이유이고 홍규목이 대를 이어 당산나무가 된 사연이다.

사람들은 느티 언덕에 자리한 느티나무만큼 균형 잡힌 나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모습이 비범하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짙은 초록빛이 무성한 여름, 붉은 자줏빛으로 물드는 가을, 다시 노랗게 변하다 땅에 떨어지는 겨울, 그리고 새잎이 돋는 봄. ‘수령 500살 추정. 높이 24미터. 둘레 10미터. 대포시 대포읍 대포리 당산나무. 정자나무. 이름 홍규목. 2002.2. (138쪽)’라고 적혀있는 팻말이 느티나무가 보호수인 이유다. 500년은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마을 풍경을 수백 년 동안 보아온 이야기다.

느티 언덕은 대포읍에서 유일하게 사방으로 트인 장소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좋아한다. 함께 장기나 바둑을 두고 게임기와 스마트폰을 들고 모여든다. 그곳에서 일상을 나누다가 바람이 썰렁하게 불면 슬슬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무 둘레가 굵은 느티나무 기둥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도깨비가 드나드는 문이 있다. 그 문을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느티 언덕을 내려오다 두 갈래 길에서 헤어지고 또 갈래 길이 나오면 헤어진다. 손을 흔드는 그들의 얼굴에 퍼진 웃음이 바람에 또 흔들린다. 대포읍은 느티나무에 얽힌 사연이 많다. 이렇게 멋진 나무가 있는 마을에 산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무에 깃든 정령이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재미없다. 세상에는 오랜 사물에 담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추억이 되는 이야기들이.

느티나무에 사는 도깨비, ‘느티샘’도 영생하는 것은 아니다. 숲이 사라지면 도깨비도 사라진다. 누구는 도깨비 때문에라도 재개발을 반대하지만, 누군가에겐 도깨비쯤 사라지는 것은 그까짓 일이다. 그동안 그까짓 일이라는 이유로 나무가 많이 죽었다. 사람처럼, 어린나무도 어른나무가 필요한데 말이다. 숲에서 자란 나무가 숲을 떠나 가로수가 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불이 난 숲에서 나무가 신음했을 때, 그 신음을 들었던 나무가 옆에 있었기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도 싹을 틔우지 않던가. 혼자보다 함께가 훨씬 안전하고 평화로운 날이 있듯이. 혼자 살아갈 힘이 필요한 시기에 그 힘을 얻지 못하면 죽는다. 인간 공동체를 위해 식물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은 비열한 일이다. 다양성이란, 인간 세계만을 칭하는 것이 아닌 우주 공동체 원리이니까.

대포읍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이주 배경을 가진 학생이 많다. 대부분 엄마나 아빠 둘 중 한 사람이 외국에서 온 후,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다문화란, 한 사회 안에 여러 민족이나 여러 국가 문화가 혼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라는 의미보다는 사람(진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하는 낱말이 되어 다문화주의 없는 다문화가 되고 있다. 여러 나라 생활과 양식을 말하지만, 차별을 겪어야 하는 낱말이 되었다. 다문화 가정, 즉, 국제결혼을 한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의미가 차별을 불러온다. 사실, 대포읍에 사는 사람도 낯선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차별과 혐오가 되어 마음이 쇠락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활기가 되었다. 낯설다는 것은 새롭다는 것. 점점 세계 각국은 아니어도 아시아의 웬만한 요리는 다 있는 곳이 되었다. (131쪽) 소통하는 어려움이 신기하게도 소통가능으로 변하는 것은 생명의 무궁무진한 적응력이다.

느티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언어 소통이 가능하다. 그곳에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언어가 다르다고 무시하고 타박하고 주눅 들 필요가 없다. 느티나무에 사는 ‘느티샘’이 있는 한 그런 걱정은 기우다. 다문화와 다문화 아닌 것으로 나뉘지 않는다. 다문화에 또 다른 문화를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곳이다. 다문화는 차별을 말하는 낱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티나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식물이 하나의 공동체라면, 인간과 식물은 또 하나의 공동체다. 수많은 세포와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유전자가 거의 비슷한 식물과 인간. 자연과 인간이 가깝게 사는 생태계는 도깨비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다양한 문화다. 이 세상에는 나만을 위한 것은 없다. 내가 너를 위하고 네가 나를 위하며 서로를 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만물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존재한다. ‘느티샘’ 같은 도깨비는 어딘가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깨비 같은 존재다.

힘들고 지친 삶일지라도 살만한 이유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어두운 방으로 스며드는 빛처럼, 나무에도 빛이 되는 사연이 있다. 오리무중에 있는 실마리를 찾지 못해 어렵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막막한 암실 같은 세상이 점점 환해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가. 아무리 방음이 잘 되는 방일지라도 빛을 차단할 수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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