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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맑은물 Oct 08. 2024

성북동 나들이

2024 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소통상

  지하철역을 나오니 차도를 오가는 자동차와 인도를 걷는 사람들 풍경으로 눈이 바쁘다.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거리가 분주하다. 빗방울 사이를 비집고 떠오르는 젊은 날이 하늘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우산 쓰고 성북동으로 향한다. 인도에 넓게 펼쳐진 성북동 문학길.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만나게 되는 이정표는 예술을 암시하는 신호가 되어 내 젊음을 소환한다. 문학을 빼놓고는 내면 사건을 분석할 수 없었던 시절. 이 길을 걸으니 문학 창작에 대해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어도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 주던 친구들 모습이 생각난다. 함께 산책하다가 헤어지자는 그의 말을 듣고 당황한 마음을 감추려 웃었던 어떤 날도 기억난다. 자기가 원하는 문학을 할 수 없어 귀신같이 학교를 떠난 그리운 이를 떠올리니 으스스 몸이 떨린다.

  ‘커피콩 집’ 간판이 반갑다. 출입을 알리는 종소리와 주인 시선이 나를 반긴다. 성북동 문학길이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는다. 아주 진한 커피를 주문하고 비 내리는 길을 바라보며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가 꽤 안락하다고 생각한다. 으스스 떨렸던 몸이 따뜻해진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영화 장면 같다. 나란히 묶여 있는 자전거, 산책하는 강아지, 삼삼오오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패딩 입은 학생들, 한쪽에 모아놓은 쓰레기 그리고 성북동 문학을 알리는 조형물 등등. 영화 같은 거리 풍경이 내 푸릇한 시절을 데려온다.

  그 시절, 이 거리에서 펼쳐졌던 별별 문학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발견할 줄 몰랐던 것을 문학에서 발견하고는 깊이를 알고 싶어 문학 언저리에서 기웃대던 날들. 시절 여행은 아쉬운 것도 아니고 그늘지고 우울한 몽상도 아니며 거무스레한 날을 찬란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뼈대를 만지고 싶었던 욕망이 ‘지금’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족하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미래로 향한다는 것. 마치 무덤 저편에서 흔들리는 꽃 한 송이를 발견하는 느낌이랄까.  

  성북동과 예술. 1930년 이태준과 성북동 그리고 ‘구인회’ 문학단체 회원들. 박태원, 한용운, 김기진, 김일엽 등 문인들. 정지용,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 ‘청록집’ 발간으로 이어진 인연. 김광섭, 염상섭의 문학과 김환기를 비롯한 회화 예술가들. 문인들 책에 표지를 꾸미고 시에 곡을 붙이는 종합예술이 활활 타오르던 장소. 장소는 부동성을 부정하지만, 흔적은 부정할 수 없다.


  금세 식어버리거나 바뀌는 생각 흐름은 상황에 따라 금세 달라지는 목소리만큼 비정형성에서 출발한다. 예외적으로 마음과 생각이 따로따로 변주될 때도 있지만, 비와 습기가 본질은 같지만 다른 말이듯이 원초적 본질에서 변형된 사물을 마주하는 현상이 삶이라는 생각이 빗줄기처럼 이어진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나는 왜 글을 쓰는지, 왜 쓰고 싶은지를 자문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흥분하고 열을 내는 것 같지만, 기억 회로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이유도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다.

  눈물 젖은 밤을 보내며 만났던 문학이 더욱 신실하고 절실했던 시절로 데려가는 길이 성북동이 아닌가 싶다. 최순우 옛집을 지나 간송미술관으로 향하는 발길이 숨이 차다. 점점 가팔라지는 길 따라 도착한 심우장에서 숨 몰아쉬기를 두어 번 하니 갑자기 딸꾹질 같은 재채기가 나온다.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장식품을 보고 놀랐기 때문일까. 주변 경관을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했는데 그 아름다움이 한용운이 품고 있던 굳건한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여서일까. 보기 싫은 조선총독부 때문에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한용운이 차근차근 다져놓은 결의와는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만해가 품고 있는 의지가 흐물흐물 뭉그러질 것 같아서일까. 속내보다는 외향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간질간질해서일까. 꼭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그저 사소한 개인감정과 속 좁은 아쉬움 때문일까.

  비가 그치는 듯하다가 다시 내리는 보슬비는 서두르지 않는 발길에 리듬이 된다. 대사관 길 여기저기를 헤매다 도착한 우리옛돌박물관. 내 젊은 날에는 볼 수 없던 풍요로운 예술 문화 확산과 다양성에 감탄한다. 비가 스미는 돌이 가진 속성처럼 문학청년 시절이 스며든 문학 감성이 오늘을 더 산문적이게 만든다. 박물관 옥상에 올라가니 구불구불한 성북동 길이 한눈에 보인다.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그 반대편으로 삼청각이 보인다. 사대문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선에 있지만 마음은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다. 비 오는 날 산마루에 올라와 있는 느낌이 그저 좋을 뿐, 그 어떤 경계도 필요하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버스는 길상사 정류장에 멈춘다. 비에 젖은 우산을 털며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 얼굴에서 마치 그림으로 그려진 습기를 보는 듯하다. 비가 그치면 나타날 해의 반짝임도 그들 얼굴에 인광으로 빛난다. 의견을 묻거나 경청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는 감상이 젊음인 것처럼 아무 능력 없이 보이는 것조차 허용되었던 나의 청춘.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것조차 상관없는 얼굴로 내 젊은 날, 다소 산만하고 정리되지 않은, 그러나 싱싱한 문학을 떠올린다. 걸어서 올라갔던 길은 멀었지만 꼬불꼬 버스로 내려오는 길은 가깝다. 올라가는 길은 저릿하고 내려오는 길은 아련하다.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내 청춘과 함께하는 나들이도 이쯤에서 막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 계단을 한 발 두 발 내려가며 생각한다. 어떤 날이 떠오르는 것은 커피콩 맛을 기억하는 것, 부슬부슬 비 오는 발길을 기억하는 것, 태동하는 문학을 암시한다는 것, 암시에는 여전히 발아하고 또 발아하는 ‘젊음’이라는 씨앗이 살아 있다는 것,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하는 것을 조율하기 위해 기억 창고를 정리한다는 것, 구렁텅이 같은 외로움이 언제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 아예 소원을 들어주는 조물주는 없다고 포기하는 것, 그런데도 딱히 소원은 없지만 소원을 생각해 보는 것, 생각한 소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꽃동산을 만나고 휴식으로 흐르는 강을 만난다는 것, 그러다 쉬운 수수께끼 같은 갈림길에서 서성이며 우물쭈물하다가 부모님 기일은 생각나는데 부모생일은 가물가물해 잠깐 정적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오늘 하루의 기억은 또 달라지고 편집될 것이다. 어떤 의식에 깊이 잠수할지도 모른다. 잠수한 의식이 상상할 수도 없는 보물이 되어 눈부신 기억을 소환할지도 모르지만 편향된 기억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기억에게 사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세상처럼 급변하는 마음으로 만지작거린 기억 오류로 말이다. 부동성을 지닌 사물도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에 따라 다르듯이, 늪이 되고 산이 되는 슬픔과 고통이 흐르는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삶의 밑동에서 움직이다 스르르 사라지곤 하지 않던가. 가슴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생각을 납작하게 만들어도 다시 원형을 유지하는 복원력이 고개를 내밀지 않던가.

  그것이 나에겐 문학이다. 문학에서 오류를 만나면 수정하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감동을 만나기라도 하면 꽃 같은 이야기로 위로를 건넨다. 나에게 문학이란 동화적 상상이 가미된 모험이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끝내주는 모험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 삶이 보내는 안부 편지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지금까지 내 삶에 연결된 탯줄이다. 성북동 나들이처럼, 나에게 문학은 목적 없는 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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