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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May 15. 2017

영화를 영화로 영화하기

영화 리뷰[홀리 모터스]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아니 규정이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아니, 왜 규정해야 하는가?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문다. 하나는 단언컨대 <홀리 모터스>는 규정적이지 않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듯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듯, 이 영화는 만날 때마다 모습을 달리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모습을 달리하는 영화 속의 주인공, '오스카'처럼 말이다. 또한, 이와 같은 영화의 자기-반영적 모습은 <홀리 모터스>가 가진 특이성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보는 것이 영화인지 혹은 삶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 인지에 대한 질문을 흩트려 놓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삶을 나누는 이분법적 경계들은 이 영화에서 희미해진다. 그렇다, <홀리 모터스>는 다만 움직일 뿐이다.

  'Le dormeur', 잠자는 사람이 영화의 시작에 등장한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제시될 뿐(보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것'은 '잠자는 사람'이다. 그는 움직인다. '잠자는 사람'은 깨어서 움직인다. 거울과 창문, 테이블까지 여러 곳에 반영들이 가득하다. 공간과 이질적인 소리, 마치 항구에 있는 듯한 소리들이 들린다. 이질감을 느끼는 찰나, 그가 벽을 찢듯이 부수고 나간다. 그리고 그가 당도한 곳은 영화관이다.

 '잠자는 사람'은 다름 아닌 레오 까락스 감독 자신이다. 그는 직접 자신이 '잠자는 사람'으로 영화에 출연한다. 반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몇몇은 눈을 감은 채로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반영이다. 우리는 감독의 '꿈'이거나 '꿈과 유사한 무언가'거나 '무의식'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을 '꿈'이라고 명명한다면, 관객은 감독의 꿈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타자들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깨어있는 '잠자는 사람'은 그 꿈을 꾸거나 펼쳐 보이는 감독이다. 상영관을 지나다니는 아이와 검은 개의 이미지는 감독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관객은 <홀리 모터스>라는 영화 제목에 가려서는, 마치 벽처럼, 감독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과도 같은 역할이다.

 영화의 전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3번, 흑백 영화가 등장한다. 짧고 반복적인 흑백 영화는 마치 막을 나누듯 세 번에 걸쳐 등장한다. 중간에 흑백 장면이 지나간 이후엔 '막간'이 등장하며 롱테이크로 끊어지지 않는 연주가 등장한다. 그리고 막간이 끝난 후와 막간이 나오기 전에는 극의 중심 이동이 전제되어 있다. 막간의 앞부분에서는 '오스카'가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카메라는 오스카의 행동을 하나하나 잡는 것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막간의 뒷부분에서는 '오스카'가 마찬가지로 주요한 인물이지만 극의 중심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 이동한다. '오스카'는 자신과 유사한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혹은 셀린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차에서 내려 '진'과 이야기를 나눈다.

  막을 구성하는 각각의 단편적 영상들에 대해 주석을 달고자 하진 않는다. 다만 여러 장면에서 받았던 감상의 흔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흥미로운 점은 연출 방식들이 역할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사업가에서 걸인으로, 걸인에서 모션 캡처 배우 그리고 광인으로 변해감에 따라 편집의 속도와 쇼트의 구성은 제각기 달라진다. 특징적으로 광인이 되었을 때 사용되는 '아이리스 아웃'(원형의 이미지로 화면을 전환하는 기법) 같은 독특한 편집이 있다. 이는 다변하는 드니 라방의 연기만큼이나 다양한 레오 까락스의 연출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장면은 여럿이기도 하지만 "택시, 저 비둘기를 쫓아가 줘요."라고 하는 장면과 원숭이들로 가득한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택시"에서는 그 허탈하면서도 우연한 웃음으로 위기를 환기하는 모습이 좋았다. 원숭이 아내와 원숭이 자녀가 있는 집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 밑으로 깔리는 노래의 이야기까지, 영화는 가장 극적인 곳을 향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며 다시 '홀리 모터스'가 등장한다. '홀리 모터스'에 정차한 리무진에서 셀린이 다시 가면을 쓰고 '집'으로 향한다. 셀린은 또 다른 이야기를 리무진 밖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셀린이 떠나자 리무진들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리무진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자신의 의미가 가졌던 경계를 다시 무너트린다. 막간과 같은 구분마저도 무의미하게, 영화관에서 넘어온 이야기가 무의미하도록 말이다. 어쩌면 리무진들은 각각이 하나의 카메라였을 것이다. '잠자는 사람'이 보던 영화는 리무진 안의 이야기, 카메라들이 기록한 영화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거나 "우리도 곧 폐차장으로 밀려날 거야"라고 말하는 리무진들은 그 위치에 처한 필름 카메라의 마지막 발언과도 같다.

 이는 극의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한 남자와 '오스카'가 나눈 이야기와 상충한다. "카메라가 점점 작아져 머리보다 작아지는" 상황에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리무진들이 설자리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리 모터스>는 여전히 자신들이 신성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영화적인 문법을 점철해서는 무엇이 영화고 무엇이 현실을 담아낸 것인지 조차도 불분명하게 만든다. 희미한 영화와 삶의 경계, 꿈과 영화의 유사성,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듯 그려내는 연출, 중간중간 등장하는 강렬하면서도 이미지적인 장면들, 흑백 영화에 대한 고민까지. 모든 이야기들은 제각기의 이야기로 생동하여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하나의 지점을 지난다. 그 지점은 바로 '영화적'이다.

 막간의 전과 후를 1막과 2막으로 그리고 '오스카'의 연기가 끝나는 지점과 영화의 전체를 감싸는 것이 3막의 구성이라고 지칭하자. 1막은 '오스카'의 자유롭고 흥미진진한 연기를, 2막은 '오스카'의 영화 외적인 삶과 관계의 확장을, 3막은 영화의 현실과 현실의 영화라는 관계를 넘나들어서 그 경계의 모호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홀리 모터스>는 '신성한' 영화를 직면케 한다. '죽어있는', 움직이지 않는 관객들이 다시금 신성한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움직이는 것, 살아있는 것으로써 영화를 만나고자 한다.



**본 리뷰는 아트나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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