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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Aug 03. 2017

익사의 경험

영화 리뷰 <덩케르크>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뛰는 사내는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달리고 있다. 아니, 피해 달린 다기 보다 순전한 공포를 등 뒤에 두고 앞으로 뛰어나간다. 초라한 행색의 군인들이 텅 빈 거리를 걸어나가는 모습이 크게 보이고 돌연 쏟아지는 총알에 뛰어가던 군인들이 쓰러진다. 한 사내는 겨우 총알을 피해 아군의 진지로 뛰어간다. 진지를 뒤로한 채 그는 아군의 기지로 뛰어간다. 사내는 수십만 명이 무력하게 펼쳐진 넓은 해변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죽음의 위협을 겨우 벗어나 숨을 돌렸던 일말의 안도감은 이내 넓적한 바다를 바라보는 공허감에 자리를 내어준다. 사내는 줄의 뒤로 가 미미한 숫자를 더한다. 그는 덩케르크에 도착한다.

 이 단조로우면서도 강력한 도입부는 덩케르크로의 진입을 완전히 맛 보여준다. 또한 이 도입부는 <덩케르크>가 '전쟁 영화'라기 보단 '재난 영화'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 영화에서 흔하게 제시되는 구도, 대립과 충돌은 처음부터 생략된다. 뒤에서 쏟아지는 총알에 같은 부대원들은 쓰러지지만 계속해서 쫓기는 모습을 보여줄 뿐 총을 쏘는 자들의 위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위협을 소리와 같은 간접 방식을 통해 제시하고 직접적으로 살기 위한 투쟁을 조명한다. 불안은 하나의 적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위협으로부터 온다. 불안이 감도는 전쟁터에서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다.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의 생명과 같아진다. 

숨이 멎도록 뛰어야 살 수 있다

 전쟁이 보여주는 거리의 모습은 끝이 없이 펼쳐진 바다의 모습처럼 황량하다. 그 황량한 전쟁터 한가운데 선 인물은 한없이 미미하다. 전투기의 등장에 땅에 바짝 엎드리는 모습을 보자니 등골이 서늘하다. 죽음, 끝,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눈 앞에 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직전이다. 무기력과 절망감은 축축한 바닷바람을 타고 공기 중에 팽배한다. 무한히 펼쳐진 바다와 땅, 하늘이 만나는 덩케르크의 경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같다. 이 광활한 지형은 완전한 배경을 제공한다.

 익스트림 롱샷에 잡힌 인물들은 광활한 지형 안에서 허우적 댈 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그들은 방황한다. 이는 인물들이 타고 있는 군함이나 전투기가 보여주는 모습 또한 유사하다. 놀란 감독의 눈에 보이는 군함과 전투기는 인간이 의존하는 문명의 이기나 하나의 '작은 배경'에 불과하다. 황량한 하늘에서 전투기는 수평선을 뒤집으며 적기를 추격한다. 날카로운 무기의 소리가 귀를 찌르지만 적기에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다. 망망대해의 상공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그 배경에 비해 너무나도 앙상하다. 그러나 아군의 전투기가 맡은 임무는 너무나도 막중하다. 적기를 격추하지 않으면 수십, 혹은 백 명이 넘는 군인들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영웅이 아니다.

실제 전투기를 사용하여 촬영 했다고 한다. 이런... 리얼리스트...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덩케르크> 속 군인들은 번쩍번쩍 빛나지 않는다. 그들은 황량한 지형 위에선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의 군상일 뿐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손쉽게 남을 몰아세우고 우악스러운 폭력을 가한다. 머스켓의 장전을 하는 것부터, 착륙을 위해 바퀴를 내리는 것까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들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전쟁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화 같은' 멋진 병사는 없다. 적군에게 쫓기고 있고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죽음을 목전에 둔 군인은 한 개인으로서 생존을 갈구한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비겁하고 무력하다. 공군은 무엇을 했냐며 힐난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인간이 일으킨 전쟁에서 모든 인간은 나약하다. 재난처럼 몰아치는 전쟁의 위협에서 인류애와 연민은 한 줄기 빛처럼 내린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살아 남기 위해 그렇게도 발버둥을 치는 것이니까.

 그러나 절망은 빗나가지 않는다. 나약한 군인들을 태운 배는 적의 공격으로 침몰한다. 희망의 빛조차 사라지고 거대한 전함이 좌초된다. 침몰하는 전함은 물에 잠긴다. 화면은 짙은 어둠 같은 바닷물로 잠긴다. 화면을 나눠주던 명확한 경계는 물이 되어 차오른다. 그 어둡고도 맹렬한 이미지는 익사를 경험케 한다. 인물들은 하늘과 바다를 나누는 경계에 위치한다. 익사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인물들은 생과 사의 경계에 걸쳐진다. 그러나 경계의 일렁이는 선, 해수면은 인물들을 여지없이 집어삼킨다. 잔혹한 감독은 이토록 짙은 절망 뒤에 안도감을 선사한다. 겨우 죽음에서 벗어나서, 이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선박들이 맹렬하게 해안으로 전진한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그토록 당당하고도 힘 있게 화면의 수평선을 가로지르며.

애초에 스토리부터 영국뽕

 이러한 이미지적 체험은 비겁한 인간의 군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한다. 관객은 익명의 개인으로 하나의 군인이 되고 차오르는 바닷물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비겁한 생존을 위한 공감을 나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잘생겼지만 안타까워 보이는' 군인의 이름이 토미라는 것을 모른다. 흔한 대사 한 마디 없이 토미는 두려움에 떨고 비겁하게 행동하며 전력으로 헤엄친다. 살기 위해 분투한다. 이런 생존 과정의 끝에 검은 기름에 덮인 인물이 보이며 긴장은 최고조로 팽창한다. 놀란 감독은 인물을 가장 잔혹한 경계에 올린다. 줄곧 익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생의 경계라고 믿었던 해수면이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우리는 희망조차 없는 죽음을 목도한다. 그리고 세찬 물결에 끌려가다가 숨을 틔우는 남자를 보며 겨우 일말의 안도를 찾는다.

 '체험'의 교차 편집은 생존을 위한 분투라는 점으로 종결된다. 급박한 재난을 겨우 벗어나면 놀란은 감정을 정당화하는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긴박함을 잠시 내려둔 인물은 갑자기 자신의 대사를 읇기 시작한다. 별 말없이 경험을 전달하던 인물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며 관객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이 비겁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자책한다. 살아온 자신을 달갑게 받아주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처칠의 말을 빌려 생존만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이 치명적인 실수는 <덩케르크>의 마무리로는 다소 치졸한 부분이다. 산전수전을 함께 겪은 인물들이 갑자기 나와 멀직이 떨어져서는 자기비판과 합리화를 하는 모습이라니. 

장군의 눈물까지도 감동이었는데...

 영화적 경험에 푹 빠져 있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체험'을 위한 이미지적 구상이 그토록 치밀하게 짜여 흔한 이야기 구성 없이, 매혹적인 캐릭터 없이 만들던 서사를 한 번에 던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는 이미 그들이 보여준 발버둥만으로, 생존을 위한 분투만으로도 충분한 그들의 행동에 구태여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는 꼴이다. 과연 처칠의 말을 인용한 것이 보여준 것만큼 대단한 미사여구가 될 수 있었을까? 다소 아쉬운 마무리를 보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덩케르크>는 처절한 실패들과 안타까운 죽음들, 비겁하고 무력한 생존을 광활한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보여준다. 전쟁과 참상을 거대한 폭발이나 유혈이 낭자하는 모습으로 대체하지 않는다. 거대한 전쟁은 지형과 배경 그 자체가 되고 그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초라한 생명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숨이 막힌다. <덩케르크>는 (중후반부까지) 어떤 설명도 가미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지, 영화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쏟아낸다. 교차 편집은 원래 그랬던 것 마냥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 붙인다. 관객은 이야기를 분석하고 이해하지 않고 체험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체험이라는 방식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생존을 위한 투쟁'을 감동적으로 펼쳐 보인다.

화면비와 색감이 튀는 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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