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더 테이블>
CG일까? 깃털처럼 보이는 흰색의 것들이 흩날리며 영화가 시작한다. 다시 한번 보니 흩날린다기보다 부유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저기는 물 속일까? 물 속이라면 무엇을 비추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짙어질 때쯤 시선은 멀찍이 떨어지고 그것은 한 물체를 초근접으로 촬영한 영상임을 알게 된다. <더 테이블>은 물체를 섬세하게 영상 속에 녹여낸다. 그리고 그 대상이 인물로 바뀌었을 때도 대상에 대한 섬세한 집중은 여전하다. 제목에 나오는 테이블이 반듯하게 영상에 담기고 카페의 주인이 정갈하게 테이블을 닦는다. 차분히, 또 섬세하게 영화는 시작한다.
<더 테이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네 명이다. 20명이 넘는 등장인물 중에서 주인공이 네 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가 그토록 섬세하게 잡고자 하는 것은 네 명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단절된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모종의 연관을 보여주는 네 여성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풀어놓는다. 그러나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다만 언어로 된 것이 아니다. 말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불완전하고 명확하지 못한 표정과 몸짓들이다. 그러나 이 표정과 몸짓들은 그 본질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네 명의 여성이 보여주는 표정은 제각각이고 그들의 표정 또한 대화와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오히려 맞은편에 앉은 이들이다. 상대로부터 이야기들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유진이 어떤 사람이었고, 경진과 무슨 관계를 가졌으며, 은희가 어떤 이벤트를 기획하고, 혜경이 무슨 사연을 가졌는지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드러낸다. 이런 말들에서 흘러나온 단서를 통해 관객들은 대화에 참여한 청자가 되어 이야기를 구성해 나간다. 그러나 언어적인 이야기들은 마치 하나의 소문처럼 실체도, 진실도 가지지 않은 채 인물 주위를 부유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증명될 수도, 할 수도 없는 떠도는 풍문처럼 떠나닐 뿐이다. 그렇게 주인공과 마주 앉은 이들은 이야기를 말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오히려 테이블과 함께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직접적인 반응이다. 그 시간, 그 순간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들이다. 눈가의 떨림과 웃음, 주름, 눈짓과 입의 모양새, 콧잔등을 찡그리는 표정까지 한 마디의 말이 오갈 때마다 그들의 표정이 섬세하게 바뀐다. 카메라는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의 얼굴에 남은 세세한 흔적들을 모두 담아내고자 노력한다. 넓은 화면에 펼쳐진 배우의 얼굴을 도화지 삼아 그들은 표정으로 경험을 전달한다. 다만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과 경험인 것이다. 이는 주인공의 반응으로 드러난다. 옅은 떨림, 혹은 과하게 짙은 웃음으로 그려진다.
김종관 감독은 두 시선에 있어서 하나의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곳에서, 그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했다. 말하는 이의 표정과 듣는 이의 표정이라는 두 시선 사이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말하는 이, 즉 주인공과 마주 앉은 상대의 말은 들리게 둔 채 주인공의 표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통해 말로 된 이야기에 변주를 주거나 이야기를 변형된 인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과 마주 앉은 이를 통해 말로 된 이야기를 전하고, 주인공의 반응을 통해 이야기를 인식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유진과 마주 앉은 창석을 통해서 우리는 유진이 유명인임을 유추해낸다. 이는 창석이 유진에게 "유명해졌더라."라고 하고, "사진 찍어도 되냐(직장 동료들에게 자랑을 하려고)"고 묻는 둥 단서가 있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친구는 아니었지" 같은 대사를 통해서 그들이 단순한 친분 관계가 아님을 시사한다. 이것은 이야기다. 유명 배우인 유진의 전 남자 친구 창석이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 창석은 계속 직장 동료들이,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며 시답잖은 부탁을 계속 해댄다. 창석의 이야기는 영화 내적으로도 신뢰가 없지만 영화 외적(관객들에게)으로도 '믿음직한' 말은 아니게 된다. 카메라에 잡힌 유진의 어이없어하는 듯한 표정을 관객들은 어느새 따라 짓고 있다.
유진은 처음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하고 나타난다.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것을 보며 우리는 그가 유명인이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한다. 그리고 창석의 말을 통해 짐작을 확정 짓고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우리는 마치 유진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상황을 보고 이 시답잖은 일을 당하는 유진은 얼마나 불쾌할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린다. 이 경험을 매듭짓는 것은 유진의 표정이다. 창석의 말에 대한 유진의 반응이다. 이러한 방식은 유진 이후에도, 경진의 불안, 은희의 떨림, 혜경의 모호함을 드러내고 단순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확장하여 순간을 통해 이야기를 경험하도록 한다.
섬세한 관찰이 주인공의 모습을 담아낸다. 카메라는 작은 떨림과 숨결까지도 잡고 싶은 듯하다. 그렇게 잡아낸 미세한 표정의 변화가 이야기의 외연을 바꾸어 전달한다. 마치 초근접으로 찍은 첫 장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찾아낸 작은 것이 그토록 큰 떨림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이야기에 몰입한다. 네 이야기가 각각 다른 사람, 다양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지만 대화 속에서, 인물의 반응 속에서 이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상황 속에 몰입한다. 70분이 지났다고 생각조차 못한 때에 이야기는, 영화는 금방 끝을 맺는다. 그러고 나면 다만 네 이야기를 곱씹을 시간이 남을 뿐이다.
이게 영화가 아니었다면, <더 테이블>이 집중한 이야기는 결국 네 주인공의 소문이다. 말로 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모호하고 불명확하며 불완전하다. 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말에서 이야기는 시작하여, 순간의 감정들이 언뜻언뜻 스치며 숨을 불어넣고 다시 말로 돌아가며 숨을 내뱉음으로써 구성을 위한 파편을 만들고, 반응과 변화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실재한 것처럼, 테이블의 주위에 특정한 시간에 기억으로 남는다. 이 영화적인 순간을 통해 테이블은 70분의 생명을 얻는다. 비록 70분의 짧고도 불완전하며 파편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생명을.
* 다른 생각
<더 테이블>은 마치 단편 영화처럼 짧은 4개의 소극이 모인 영화다. 소극은 각각의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두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가 다소 연관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이는 다만 결과로 나타난 것에 대한 심증에 불과할 뿐, 명확한 연관을 가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에피소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정의 강도에 따라 일련의 배치를 가진 듯 하지만 이 또한 명확하진 않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테이블>이 보여주는 70분의 이야기는 부담스럽지 않게 지켜볼 수 있다.